
우리의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대립의 꽁꽁 언 마음들이 녹지 않고,
더욱 예각을 드러내는 듯하다
그런 결빙의 아픔과 염려가 얼은 강
풀리듯 하길 바라기에 더욱 봄소식이
반가운 것이리라. 다양한 봄소식들은
아픈 기억을 누그러뜨리고, 상처를
치유하는 기운이 있는 듯 느껴진다
이런 해체와 치유력은 자연이 갖는,
자연으로 열린 야생의 환원력의 작용
때문이 아닐까? 이사 후 나무 심기를
먼저 생각하는 이의 마음이 예쁘게
여겨진다. 그의 마음은 현재에만
머무르지 않고, 큰 나무가 꽃그늘을
드리우는 미래로 열려 있는 것이다
그의 멋진 봄꿈을 위해 기왕이면 유난히
붉은 홑꽃의 동백나무를 골라봐야겠다
-심매
엊그제 내린 눈의 대부분이 자취 없고, 응달만이 잔설로 빛난다.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雪泥鴻爪)'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소동파가 동생 소철에게 보낸 시에 나오는 말이다. "인생이 무엇과 비슷할까?/응당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일세/ 눈 위에 발자국 우연히 남지만/ 기러기 날아간 곳 몰라라" 그래, 인생의 자취란 대개 눈 녹듯 흔적 없는 것. 그래서 겨울의 끝이 애잔한 지도 모른다.
겨울이 혹독할수록 봄이 더 그리워지는가. 매화가 피었는지를 살피며 산천을 누비는, 한사(閑士)를 자처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처음 피는 매화를 찾아 심매(尋梅) 또는 탐매행(探梅行)을 즐기던 옛 선비들의 후예들이다. 그들이 지피는 카톡의 봄소식들이 발그레하다. 선암사 홍매와 통도사의 자장매가 피기 시작했단다. 온 산을 뒤져 매화가 피었는지를 종일 찾아다녔다는 김시습처럼 나도 설렌다. 18세기 심사정이 그린 '파교심매도', 전기와 조희룡 등이 그린 '매화서옥도' 등 매화 사랑의 그림들에 유난히 눈길이 가기도 한다. 정월 보름을 지난 무렵, 겨울의 끝이 보여주는 별스런 풍경들이다.
지난 주 문우들과 산청의 산천재와 정취암 등을 돌아보면서 새삼 눈길을 주었던 게 매화의 기미였다. 산천재 앞의 매화는 꽃망울이 부풀어 있었으나 개화 소식은 좀 더 기다려야 할 듯했다. 정작 꽃은 그 다음 날 우리 동네서 본다. 산책 중 신천 상류의 졸졸거리는 물가에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린 게 눈에 띈 것이다. 활짝 피기 전, 성글 게 몇 송이 피어있는 꽃들이 또렷하다. 옛 사람들의 "꽃이 드문 것을 중요시하고, 번잡한 것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매화 감상법을 떠올리며, 지금이야말로 매화 감상의 적기라 여긴다. 이내 여기저기서 꽃 소식들이 피어오른다. 이즈음의 매화 소식들은 백매든 홍매든 '고조된 정감의 발현'(한영규)이다.
올해 꽃 소식이 유난히 반갑게 들리는 건 무슨 까닭일까? 코로나 3년 동안 꽁꽁 싸맸던 마스크를 벗고 민낯으로 맞이하기에 그러할까? 수줍은 듯, 맨 얼굴로 맡는 매화향기가 새삼 강렬하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내내 시선을 끌고, 남북한의 대치와 더불어 미중 갈등이 심상찮게 여겨진다. 튀르기예 대지진 소식도 지구 살이의 큰 공포감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대립의 꽁꽁 언 마음들이 녹지 않고, 더욱 예각을 드러내는 듯하다. 그런 결빙의 아픔과 염려가 얼은 강 풀리듯 하길 바라기에 더욱 봄소식이 반가운 것이리라.
-야채
제주도에 사는 친구가 수선화 몇 포기를 택배로 부쳐왔다. 꽃처럼 봄을 맞으라는 축수다. 화분에 심어 양지쪽에 놓아두고 꽃 피기를 고대한다. 그 기대만으로 나날이 환해지는 듯하다.
시장 통을 지나면 쑥갓, 시금치와 달래의 빛깔과 냄새가 잃어버렸던 명절의 기억처럼 환히 되 피어오른다. 때로 날씨가 변덕을 부려 사람들이 외투 깃을 올리며 매정한 표정으로 바뀌어도, 이는 '꽃샘추위'에 불과한 것이려니 하고 벌써부터 관대해지는 때다. 대세가 봄으로 기운 것을 절감하는 것이다. 외투 속에 얼굴을 파묻어도 산책로가 있는 강가에서 개똥지빠귀의 울음이라도 들리면 봄을 내다보듯 슬며시 얼굴을 꺼집어내어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다.
그래 봄은 기적 같이 우리를 불러낸다. 다양한 봄소식들은 아픈 기억을 누그러뜨리고, 상처를 치유하는 기운이 있는 듯 느껴진다. 이런 해체와 치유력은 자연이 갖는, 자연으로 열린 야생의 환원력의 작용 때문이 아닐까? 특히 푸른 야채의 힘이 탁월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얼은 대지를 견딘 쑥으로 끓인 국은 겨울에 입은 심리적인 상처들을 잠재우는 멋진 치료약이다.
-동백
청도 매전의 산골에 터를 잡은 친구에게 이사 기념으로 뭘 해줄까 물으니, 뜰에 동백나무를 한 그루 심어달라고 한다. 온난화로 생존 가능지역이 북상했으니, 키우기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봄소식을 그리는 심정이 묻어나는 부탁이 아닐 수 없다. 이 달이 가기 전에 묘목 시장을 둘러봐야겠다.
나무 심기 역시 치유와 관계가 있는 성 싶다. 청도 지역에는 오래된 고목들이 많다. 그 고목들을 찾아서 순례하기도 했다. 한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나서 정비하는 도중에 고목 아래서 그릇 파편들이 많이 나왔다. 의아해서 물어보니, 옛 사람들이 역병이 걸린 사람을 격리하여 치료하다가, 낫거나 죽으면 그가 쓰던 옷가지와 그릇들을 땅에 묻고 그 위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은행나무가 치유의 힘을 갖고 있다고 본 것이다. 기실 모든 나무들이 그러함을 믿는다. 나무를 심는 이는 먼 시간을 내다보며, 오랜 시간이 지나 많은 이들의 심신을 달래고 치유할 수 있기를 빌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곳곳에 남아 있는 인공조림 숲들의 내력 속에서 그런 바람이 느껴진다. 함양의 상림, 경주 왕릉과 무덤 주변의 도래 숲들, 남해안 지역의 방조제 숲들, 각 지역에 남아있는 마을 숲들…. 이들 숲들은 후대를 무성히 덮어 사람들의 심성을 치유하는 환경이 되고 있는 사례들이다.
이사 후 나무 심기를 먼저 생각하는 이의 마음이 예쁘게 여겨진다. 그의 마음은 현재에만 머무르지 않고, 큰 나무가 꽃그늘을 드리우는 미래로 열려 있는 것이다. 그의 멋진 봄꿈을 위해 기왕이면 유난히 붉은 홑꽃의 동백나무를 골라봐야겠다.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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