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칠다. 거칠어도 너무 거칠다. 윤석열 정권의 공영방송 대처 방식이 말이다. 야당을 포함한 야권의 인식에 따르자면, 윤 정권은 지금 공영방송 장악을 위해 이성을 상실한 광란극을 벌이고 있다. 이 진단이 맞다면 우리 모두 윤 정권에게 돌을 던져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 무슨 일이건 합리적인 논의와 타협을 배격하면서 끝장을 볼 때까지 패싸움을 벌여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에 돌을 던지련다.
우선 윤 정권이 방송장악을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이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윤 정권 이전의 공영방송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공영방송은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 권력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과 자유를 누리면서 공정 방송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민주당의 사과와 각성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논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권을 빼앗기자 말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방송법 개정안을 들이밀면서 국민의힘에게 일방적으로 따를 것을 요구했다. 이건 도무지 말이 안되는 억지이자 무례였다. 양쪽이 만난 자리에서 처음부터 새로운 질서에 대해 논해야지 미리 혼자서 답을 만들어놓고 힘으로 밀어 붙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수용을 요구하는 법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문재인 정권 출범 전 당론으로 채택한 이른바 '공영방송 장악 금지법'을 무산시킨 것에 대해 사과나 하고 나서 그랬으면 또 모르겠는데, 민주당은 시종일관 후안무치로 일관했다.
'공영방송 장악 금지법'을 단칼에 날려버린 주인공은 대통령 문재인이었다. 그는 2017년 8월 22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진행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법안이 통과되면 온건한 인사가 선임되겠지만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사람을 공영방송 사장으로 뽑는 것이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생뚱맞은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법 개정을 무산시키고 말았다. 공영방송이 '기계적 중립'만 지킬 수 있어도 엄청난 개혁이었건만, 문재인은 결과적으로 공영방송은 '기계적 중립'을 넘어서 사실상의 어용방송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셈이었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따져봐야 소통은 불가능하다. 나는 최근 'MBC의 흑역사'라는 책까지 내가면서 내가 간절히 바라는 '공영방송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과 공영방송, 특히 MBC의 성찰을 촉구했지만, '소통 불가능'만 확인하고 말았다. 그래도 얻은 건 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에 주목할 때에 '공영방송 독립'에 한걸음이나마 다가설 수 있다는 걸 새삼 절감했으니 말이다. 나는 두 정당 모두 방송장악 열망에 있어선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언론노조와 시민단체의 성향이다.
6년 전인 2017년 8월 25일 민주당 의원 워크숍에서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공유했던 내부 문건을 보자. 이 문건은 '방송사 사장·이사진 퇴진 운동' 전개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언론노조와 시민단체와의 협력을 제안했다. 실제로 모든 게 이 시나리오대로 이루어졌지만, 새삼 비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국민의힘은 이런 내용의 문건을 작성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국민의힘이 더 도덕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민주당은 언론노조와 시민단체의 힘을 빌리거나 같이 협업을 할 수 있지만, 국민의힘은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언론노조와 시민단체의 기본 인식은 "국민의힘은 한마디로 방송장악에 있어서는 전과 집단"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권의 방송통제와 관련해 언론노조와 시민단체를 자발적 우군으로 둘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건 엄청난 차이를 낳는다. 예컨대, 언론노조 소속 방송인의 친(親)민주당 방송은 불공정 방송이지만, 권력의 개입 없이 자발적 소신에 따른 것이기에 문제 삼기가 애매하다. 반면 언론노조와 매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국민의힘은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없어 법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통제 시도를 하게 된다. 실속도 없이 '방송장악'의 오명과 악명을 뒤집어 쓰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는 그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나는 윤 정권이 '공영방송 독립'을 대통령 윤석열의 업적으로 삼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순진한 제안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건 방송장악을 했던 정권들의 말로가 어떠했는지를 보고서도 그러느냐는 반박을 하고 싶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문재인 정권만 하더라도 공영방송의 정권에 대한 충성에 도취되지 않았다면 정권 재창출이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땡전뉴스'로 대변되는 80년대식 여론조작 시대를 졸업한 지 오래다. 때는 바야흐로 소셜미디어와 유튜브로 대변되는 디지털혁명의 시대가 아닌가. 방송의 집요한 정권 공격은 정권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지만, 정권 찬양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공영방송을 정치적 중립지대로 만드는 건 집권세력에게 불리할 게 없다. 윤 정권의 경우엔 민주당 정권과는 달리 방송통제 시도가 심각한 민심 이반을 초래할 수 있으며, 내부적인 충성 경쟁으로 인한 무리수가 저질러지면 정권이 흔들거릴 수 있을 정도의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기에 더욱 그렇다.
지금 우리가 공영방송과 관련해 벌이고 있는 싸움의 질과 수준은 너무도 편협하고 천박하다. 윤석열이 '통 큰 결단'을 내려 '공영방송 독립'을 자신의 대표적 업적으로 삼기를 바란다. 그간 어떤 정권도 그런 의지가 없었을 뿐 그 방법을 몰랐던 건 아니다. 독립된 새로운 공영방송은 기존의 정치적 공정성 의제를 넘어서 아예 '정치 과잉'과 결별하고, 민생 위주로 사회 전반의 구조적인 문제에 눈을 돌리는 동시에 글로컬(글로벌+로컬)한 관점과 실천에 주력해야 한다. 다른 나라의 공영방송사들이 한국의 공영방송을 벤치마킹할 정도로 한류 못지 않은 국가적 긍지의 원천으로 키워보자. 그건 우리의 역량으로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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