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교사들에게 고통과 비애를 안겨 준 학부모 갑질이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다시 갑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갑질 관련 언론 기사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최근 나온 어느 기사에 달린 다음 댓글이 내 눈길을 끌었다. "외국인 친구가 한국살이 하면서 신기해 하던 부분이 전화 문의상담 할 때 안내 첫 멘트가 안내원에게 폭언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함. 폭언하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줘야 할 정도로 폭언이 많냐며 물어봄."
뭐라고 답해줘야지? 이 댓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마치 자신이 받은 질문인 것처럼 난감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갑질 사회'라고 말해줘야 하나? 그런데 '갑질'을 뭐라고 설명하지? "약자에게 못되게 구는 것"이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생각할 것들이 많아진다.
지난 2015년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지금 대한민국은 수많은 '을'의 눈물로 가득찬 '갑질민국'", 즉 '갑질 공화국'이라고 했다. 이즈음부터 해외 언론들은 갑질에 걸맞은 단어가 없어 우리말 발음 그대로 'gapjil'로 표현했다. 이 때만 해도 갑질을 권력이나 금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나쁜 짓으로 여겼지만, 수년이 흐른 이젠 그렇게 보긴 어렵게 됐다.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 최항섭이 중앙일보 8월 5일자 인터뷰에서 잘 지적했듯이, 어느덧 한국 사회는 "계약 관계에 따라 누구나 갑질을 주고받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사회"로 접어 들었기 때문이다.
즉, 갑질은 '내로남불'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의 갑질은 갑질이라는 게 분명해 보이지만, 내가 하는 갑질은 정당하고 합리적인 문제 제기로 오인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이 말을 하는 순간, 나도 등골이 좀 서늘해진다. 내가 정당하고 합리적인 문제 제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상대에겐 어떻게 받아 들여졌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어느 TV 개그 프로에 옷 가게 짜장면 배달 장면이 있었는데, 이거야말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갑질 사회'를 실감나게 풍자한 '명작'이 아닌가 싶다. 이런 내용이다.
"야, 아까 출발했다면서 왜 지금 오는 거야? 단무지는 뭐 이렇게 적어? 옷도 거지같이 입고 다니네." / "아, 예. 맛있게 드십시오." / "인사성은 더럽게 밝네." 잠시 후 청년이 다시 들어왔다. "꺼지라니까 왜?" / "옷 사러 왔다. 거지 같다고 해서 옷 사러 왔다고. 저거 얼마야?" / "아 예, 만원인데요." / "더럽게 비싸네." / "8000원에 드릴게요." / "2000원이나 바가지 씌우려 했던 거야? 인터넷에 올려야겠구먼." / "아, 죄송합니다." / "야, 그게 죄송한 표정이냐?"(조선일보, 2022년 7월 12일자)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갑질 사회'에선 갑질을 당한 사람이 지위나 위치가 바뀌면 얼마든지 갑질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불평등과 민주주의 연구센터가 2018년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갑질을 당한 빈도가 많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갑질한 경험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갑질을 당해본 적 없는 사람의 경우 19%만 다른 사람에게 갑질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반면, 갑질에 자주 노출되는 사람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한 번 이상 갑질한 적이 있다는 응답은 57%를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한국이 세계의 내로라 하는 '갑질 공화국'이 된 걸까? 나는 크게 특권주의, 출세주의, 승자독식주의라는 세가지 키워드로 설명하고 싶다. 특권주의란 엘리트 계급의 특권은 강했던 반면 책임은 약했던 역사·전통의 산물이다. 상층부 갑질의 그런 특권적·억압적 성격은 '전위 공격성(displaced aggression)' 또는 '억압위양의 원리'에 따라 지위의 미끄럼틀을 타고 낮은 쪽으로 이양되면서 전 국민의 머리와 가슴 속에 삶의 기본 양식으로 내면화되었다.
그렇게 내면화된 삶의 방법론이 바로 출세주의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로 대변되는 출세주의는 한국형 압축성장, 즉 '한강의 기적'을 낳은 동력이자 한국형 '코리안 드림'의 실현을 위한 방법론이기도 했다. 특권에 근접할 수 있는 출세를 위한 경쟁은 승자독식주의형이었기에 다른 경쟁 참여자들을 존중하거나 인간적으로 대접하기보다는, "남을 제치고 이겨야 산다"는 생각의 지배를 받았다. 대학입시전쟁에서 잘 나타난 이런 경쟁 방식으로 생겨난 대학서열제와 서열에 따른 차별은 젊은이들이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체득하는 갑질의 원형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맑은 정신 상태에선 특권주의, 출세주의, 승자독식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동의하지 않는 척 하는 '교양'을 발휘하지만, 조금이라도 분노하는 상태에 근접하면 본심을 화끈하게 드러낸다. 이때 나오는 말이 바로 "내가 누군지 알아?"다. 자신이 오늘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투쟁을 했는지 아느냐는 한맺힌 절규일까?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했거나 내심 그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겐 차라리 누구임을 밝히는 명찰을 달고 다니게 하면 어떨까?
그럼에도 그들을 비웃기 전에 사회 곳곳에서 '내가 누구냐'에 따라 대접이 크게 달라지는 게 아직 한국의 현실임을 개탄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나 ○○대학 나온 사람인데" 운운하는 허접한 '갑질 멘트'마저 나오겠는가. 그래서 갑질 퇴치를 위해선 총체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릴 수 밖에 없는 '문화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선 특권주의 청산을 위해 국회의원을 비롯한 고위공직자의 각종 특권을 없애거나 크게 줄여야 하며, 국민의 절대 다수가 의심하고 있는 '유권무죄(有權無罪)·유전무죄(有錢無罪)'를 지속시키는 법조 카르텔과 관행의 부패·타락을 개혁해야 한다. 이어 보통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과도한 출세 보상 격차의 문제, 즉 정규직·비정규직 격차, 대기업·중소기업 격차, 서울·지방 격차를 혁파해야 한다. 더 나아가 특권주의와 출세주의를 관통하는 승자독식주의를 약화시키는 '삶의 문법'을 확립·확산·실천할 때에 비로소 지금과 같은 '갑질 공화국'의 해체가 가능해질 것이다. 해결책이 너무도 어렵게 여겨져 하나마나한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이대로 사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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