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 신문에서 요즘 세태와 닮은꼴을 보고 놀라곤 한다. '아 그때도 이랬구나' 하는 경탄도 있고,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구나' 하는 한탄도 있다. 정치면 기사에서 유난히 그런 '한탄'이 두드러진다. 벌써 50년도 전에 일어났던 두 사건이 바로 그 경우다.
#경모(敬母)님 시비
'경모'라니 무슨 모자 이름이 아니다. 공경할 경(敬)에 어미 모(母)를 붙여 대통령 부인 존칭으로 쓰자고 만든 조어다. 1968년 4월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공화당 훈련원을 방문한 날 "지금 경모님께서 들어오십니다"라는 방송을 한 게 그 용어의 시초다. 당 사무총장은 "앞으로 우리는 대통령 부인을 경모(敬母)라고 공경해 부르기로 했다. 대한어머니회 등 여성단체와 학계에서 연구를 거듭해 얻어낸 결과물로 당은 이 존칭을 널리 알려 모두가 쓰게 하겠다"라고 했다. 대통령에게 '각하' 존칭을 붙여 부르듯 부인에게도 특별 호칭을 붙여 지극 공경하는 느낌을 주겠다는 발상이었다.
신문에 기사가 실리자 나라 안 화제가 온통 '경모님'에 쏠렸다. 뜬금없이 경칭이랍시고 만들어 되레 대통령과 부인을 욕보인다는 비난이 주였다. 일각에선 당 의장 등 다른 고위층 부인은 또 뭐라 불러야 하는지 일부러 물으며 비아냥거렸다. 신조어를 만든 측도 반박에 나섰다. "미국에는 퍼스트레이디가 있고 군주국 같으면 퀸도 있다. 또 라틴어로 프리마돈나라고 해서 외국에는 대통령 부인에 대한 경칭이 있다. 가령 창밖을 보고 생각에 잠긴 대통령 부인에게 그냥 '부인!'하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한 신문은 똑같은 상황에 대입한 반박을 칼럼으로 실었다. "그럼 미국서는 창밖을 보는 부인에게 '퍼스트레이디'하고 부르고 군주국서는 '퀸' 이렇게 부르며 또 일부 '프리마돈나'하고 부르는가. 지난 자유당 정권 시절에는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국모(國母)님'하고 불렀단 말인가…" 그러면서 "'경모님 들어오십니다' 하는 것을 '대통령 부인께서 들어오십니다' 한다고 해서 무엇이 잘못되고 무엇이 어색한가"라며 "사생활에서의 호칭은 구체적인 인간관계가 결정하는 것이지 과잉 충성의 무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1968.5.6. 동아일보 횡설수설 란)
문제의 매듭은 결국 당사자가 풀었다. 논쟁 닷새째 육 여사는 청와대 출입 기자들을 점심에 초대, 시비로 인한 마음고생을 털어놨다. 경모 존칭이 지상에 보도된 뒤 "(청와대)밖에서 말이 많으니 빨리 해명하는 게 좋겠다는 친지들 권고 전화를 수없이 받았다"라며 "내 본의와 전혀 다른 이 구설수에서 제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날 부를 때 대통령 부인이면 어떻고 대통령 마누라라고 한들 또 어떻단 말이냐"라고 호칭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밝혔다. 시비는 거기서 잦아들었다.
#둔마에 채찍질
둔마(鈍馬)란 '둔한 말'이란 뜻이나 자기를 낮추어 이를 때도 쓴다. 1975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이 문교부 업무보고를 받을 때 유기춘 장관이 그 표현을 썼다. 그는 보고 전 인사말을 겸해 "천학비재한 소직(小職)이 대명을 받아 4개월이 지났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한 뒤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의 학원 소요로 각하께 심려를 끼치게 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라고 했다. 또 보고 후 "사람이 늙어지면 도로 젊어질 수 없으나 국가와 민족은 도로 젊어질 수 있는데 우리 민족은 지금 젊어가고 있다"며 "국가와 민족은 영명강직한 지도자 아래 충실한 교육이 있으면 젊어진다"라고 부연했다. 이어 "둔마와 같은 소직은 충성을 다하겠사오니 더욱 변함없이 채찍으로 계도해주시기를 복망하옵니다"라고도 말했다. (1975.2.8. 동아일보 휴지통 란)
둔마 외에도 '천학비재'(학문이 얕고 재주 없음), 소직(관직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낮춰 부름), 대명(왕의 명령), 영명강직(지혜롭고 총명하며 마음이 곧음), 복망(삼가 엎드려 바람) 등 한자 고어를 두루 섞어 충성을 맹세하고 대통령을 성군 수준으로 추켜올렸다. 어려운 단어를 골라 쓰고 '도로 젊어지는 국가와 민족' 운운하는 나름의 '철학'도 담았다. 이 기사가 나가자 말 그대로 온 나라가 술렁였다. 그냥 화제가 된 게 아니라 모두가 경악했다. 어떻게 이런 아부를 할 수 있으며 이런 사람이 한 나라의 장관이어도 괜찮은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대학가에선 '둔마 장관 사퇴'를 내건 데모, 수업과 졸업식 보이콧이 줄을 이었다.
둔마 논란에 대해 해명이나 사과 등 매듭을 지은 사람은 없었다. 장관 본인은 물론 박 대통령도 그날 이후 그와 관련한 발언은 전혀 하지 않았다. 유 장관은 이듬해 9월 장관 집무실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질 때까지 근무했다. 12월에 후임이 올 때까지 병상에 누워서도 장관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경모님 시비'가 닷새 만에 일단락되고 사람들 입방아는 물론 역사의 기록에서도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지만 (어떤 검색 엔진에도 경모(敬母)란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둔마'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 최절정 아부의 대명사'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얘기된다.
#2024 정치권
지난주 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한 위원이 "더불어민주당의 아버지는 이재명 대표님이다.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대표님께서는 영남 민주당의 발전과 전진에 계속 관심을 가져주셨다"라고 말하며 90도 인사를 올렸다. 당장 여당에서 "북한 뉴스를 듣는 줄 알았다. 어버이 수령을 말하는 것이냐"란 비아냥이 쏟아졌다. 민주당서도 발언에 고개를 외로 트는 사람이 많았지만 정작 당사자는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 한 걸 두고 왜 남자를 어머니라 하느냐는 격"이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논란이 이어지자 민주당 대표비서실장이 방송에 나와 "이 대표가 불편해하며 그런 발언은 좀 말려달라고 했다"라고 밝혔으나 시비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선거방송심의위는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를 대상으로 한 '김건희 특검법'을 여사 존칭 없이 불렀다고 해 방송사에 '권고' 제재를 내렸다. 법안 정식 명칭이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의…특검법'으로 오히려 여사를 붙이면 왜곡이 될 수 있는데도 제재를 강행한 것이다. 이후 방송에서는 '김건희' 말만 나오면 "꼭 여사를 붙여야 합니다. 아니면 제재를 받습니다"라는 진행자 경고가 뒤따른다. 신문들도 법적 명칭은 제쳐두고 '김건희 여사 특검법'이라고 꼭 여사를 붙여 기술한다.
50년 전보다 못한 것은 정치인가,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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