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易地思之'] '맹종과 아첨', 이젠 정말 안녕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입력 2024.12.10. 08:08
강준만(전북대 명예교수)

역사는 반복되는가? 정치칼럼니스트 윤태곤이 8개월 전에 쓴 "윤 대통령과 친윤은 8년전 총선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조선일보, 4월 17일)라는 제목의 칼럼을 다시 읽어본다. 워낙 인상적, 아니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어쩜 이리도 달라진 게 없는지 안타깝다는 생각과 더불어 우리 인간의 망각과 어리석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윤태곤은 "(2016년 4월) 총선 패배 자체가 탄핵으로 귀결된 박근혜 정부의 처절한 몰락을 가져온 건 아니다. '패배 이후'가 진짜 문제였다"고 말한다. 그는 "쇄신 압박이 강해서 당선자들은 새 원내대표로 충청권 비박 정진석을 원내대표로 뽑았다. 그때가 5월이었다. 지도부가 공중분해 된 상황에서 임시로 당권을 쥔 정진석이 전당대회 때까지 비대위원장을 맡는 것이 합리적 수순으로 보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신위를 별도 기구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정진석은 험지인 서울 양천을에서 3선에 성공한 까칠한 쇄신파 김용태를 혁신위원장으로 내정하면서 이혜훈, 김세연, 김영우 등 중도적 소장파를 비대위원으로 포진시켰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충청권과 영남권의 친박 초재선 20명이 기자회견을 열고 '편향된 시각으로 일부 계파에 앞장선 사람들이 중심이 된 것은 문제'라며 고춧가루를 뿌렸다(이들 중 상당수는 차곡차곡 선수를 쌓아 이제는 '친윤 중진'으로 불린다). 결국 김용태는 혁신위원장직을 사퇴했고 비대위 구성도 무산됐다."

윤태곤은 정진석 비대위의 좌절 이후 "청와대의 지휘와 친박계의 일사불란함이 만든 그 세 달이 박근혜 정부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말한다. 달리 말해, 이후 벌어진 대통령 탄핵은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었음에도 그 천금같은 3개월간을 계파 싸움으로 날려버리면서 그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당시 김용태는 "뼛속까지 모든 것 바꾸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지만,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친박의 반발로 혁신위원장직을 사퇴하면서 "오늘 새누리당에서 정당 민주주의는 죽었고 새누리당이 국민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어떤가? 8년 전에 비해 무엇이 달라졌는가? 달라진 게 없진 않다. 당시 쇄신파의 지도자였던 정진석은 대통령 비서실장이 돼 그간 윤석열의 오만방자한 불통 행태를 옹호함으로써 윤석열의 생각을 바꿔보려고 애쓴 쇄신파의 노력을 가로막곤 했다. 세월이 사람을 바꾸는 건지 아니면 처지가 사람을 바꾸는 건지 슬픈 마음 금할 길이 없어진다. 8년 전과 비교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건 여론과 민심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음 세 진단을 감상해보자.

(1) "역사의 아이러니다. 박근혜 정권에 저항하다 전국적 인물로 부상했고, 박근혜를 잡아넣으면서 문재인 정부의 황태자로 승승장구했던 윤 대통령이 이제는 '박근혜 트라우마'에 기대 반전을 모색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지층의 상처 혹은 공포심을 인질 삼아 버티는 정권. 지금 윤석열 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처참한 현실이다."(중앙일보 정치부장 최민우, 11월 5일)

(2) "보수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박근혜 탄핵의 경험 때문에 보수는 그동안 사실상 윤 대통령 부부에게 인질처럼 매인 형국이었다. 좌파에 정권이 넘어가선 안 된다는 걱정 때문에 어떡하든 설득해 끌어안고 가려 했다. 하지만 이러다간 초가삼간 마지막 칸까지 다 태워 먹을 수 있다."(동아일보 대기자 이기홍, 11월 15일)

(3) "지금의 여당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나타났던 고질적 병증(病症)을 그대로 보여준다. 숨 돌릴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권력 투쟁 벌이는 증세는 이제 불치병이 돼 버렸다. 더 문제는 자각도 못할뿐더러 상황을 낙관하기까지 한다는 점이다."(조선일보 기자 최재혁, 11월 29일)

이후 윤석열은 12·3 비상계엄 선포로 자기 무덤을 파고 말았으며, 국민의힘은 투표를 보이콧하는 방식으로 탄핵안을 부결시켰다. 탄핵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윤석열의 '질서있는 조기퇴진'을 추진하겠다는 건데, 아마도 "탄핵 땐 국민의힘은 물론 보수진영도 망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가 좀 이상하다. 윤석열이 그런 식으로 치명적인 자해극을 벌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을망정 여태까지 윤석열의 문제를 전혀 몰랐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희망을 가진 사람이 자기 무덤을 파는 법은 없다. 절망적 상태에 놓일 때에 자멸적인 충동의 포로가 되기 쉽다.

윤석열은 병적인 김건희 집착으로 인해 스스로 내세운 '공정과 상식'을 유린했다. 문재인 정권보다 더한 내로남불을 저질렀다. 당을 자기 부하나 되는 것처럼 함부로 다루는 독재자 행세를 했다. 이걸 막기 위해 국민의힘은 그간 무슨 일을 했는가? 적어도 1년 전부터 "윤석열 이대론 안된다"며 내부적으로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천하의 몹쓸 배신자나 되는 것처럼 욕하면서 몰매를 주지 않았던가?

윤석열의 정상화를 위해 애쓴 그들이 탄핵에 찬성하려고 하자 이마저 거세게 비난하고 나섰다. 윤석열이 그렇게 극단적인 짓을 저지를진 몰랐다는 게 정당한 변명이 될 수 있는가? 친윤 세력이 쇄신의 목소리를 가로막지만 않았다면 윤석열이 그렇게까지 망가졌겠는가? 그런 최소한의 예방 조치를 못하게 막았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탄핵 땐 국민의힘 망한다"고 협박하는 게 무슨 설득력이 있겠는가. 이미 당신들이 망친 정당이 더 망할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좀 물어보자. 윤석열은 국민의힘이 감지덕지해야 할 과분한 인물인가? 파멸의 길로 치닫더라도 대통령은 무조건 숭배해야 할 성역인가? 국민의힘은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더라도 지도자가 가는 길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레밍 정당'인가? 같이 굴러 떨어지면 되지, 왜 이제와서 그럴 순 없다며 보수의 미래라는 거창한 명분까지 팔아먹는가? 이젠 대통령의 명령만 받아먹을 생각을 그만 하고 정당이 대통령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해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벗어난지 오래건만, 권력자에 대해선 여전히 맹종하면서 아첨하는 체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적어도 맹종과 아첨에 대해서만큼은 이젠 정말 안녕을 고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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