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의 경계 속 숨겨진 고모와 나, 우리들

입력 2024.12.09. 16:16 최소원 기자
[시네마 천국] 양주연 감독 '양양'
영화 '양양' 스틸컷
영화 '양양' 스틸컷

사랑은 공평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첫째 딸 주연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의 남동생도 사랑한다. 아버지는 남매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지만 어린 시절 주연의 생일파티 동영상 속 카메라 뷰 파인더는 줄곧 남동생에게로 향해있다.

할아버지는 남매에게 크레파스를 사주셨다. 주연에겐 12색 크레파스를, 남동생에게는 24색 크레파스를 선물했다. 당신도 물론 아버지처럼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시겠지만, 알록달록한 크레파스의 개수는 딱 두 배만큼 차이가 난다.

최근 개봉한 영화 '양양'은 양주연 감독의 첫 장편영화이자 '양양(梁孃)'들의 삶이 담긴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감독이자 주인공인 주연이 가족의 '수치스러운 비밀'이 돼버린 고모의 흔적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다.

영화는 이른바 'K-장녀'로 여겨지는 주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광주에서 교직 생활을 한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가부장적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보단 가정적인 가장이 되리라 마음먹은 아버지. 그는 주연을 남동생과 동등하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주연이 느껴온 사랑의 크기는 조금은 달라 보인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아버지로부터 자살한 고모가 있다는 가족의 비밀을 듣게 된다. 아버지에게 고모에 대해 다시 물어보지만, 왜인지 아버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큰 상처라는 이유로 언급을 회피한다. 주연은 자신처럼 맏딸이었던, 그리고 '양양'이었던 고모 양지영을 찾아 나선다.

얼굴도, 이름도, 말 한 번 섞어보지도 못한 고모에 대한 흔적을 찾아 떠나는 주연의 여정은 처절하고도 절박하게 느껴진다. 일련의 행보를 목격하고 있는 관객들은 생면부지에 가까운 고모에 대한 집착 같은 추적에 "그가 어째서 이토록 몰두하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한다. 거기에 대한 주연의 답은 명쾌하다. 지영이 '고모'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이름은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수단이자, '나'라는 존재에게 유일성과 그 특별함을 부여하는 도구다. 첫 공기를 마시는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내뱉는 날까지 우리는 타인에 의해 끝없이 호명되는 삶을 살아간다. 이름은 우리가 존재하고, 존재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기록과도 같다.

비참하게도 고모 양지영의 이름은 바닷속 깊은 곳에 잠겨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세 글자가 되고 말았다. 분명 어느 시절에 존재해 우리와 같은 땅을 밟고 틈에 섞여 살을 부대끼며 살았지만 그 누구도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 주연은 몇 달간 그 넓은 망망대해에 뛰어들어 가려진, 그리고 숨겨진 고모의 이름을 결국 세상에 밝힌다.

영화 '양양' 스틸컷

한 대(代)를 거듭한 고모와 조카의 만남은 흑백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뤄진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 특성상 갑작스러운 애니메이션의 삽입에 몰입이 깨질 수도 있지만, 물리적 기록이 부족했던 과거의 고모와 상상 속의 조우를 그래픽으로 가능케 연출해 그 감동을 극대화한다. 특히 주연이 바닷속 잠겨있던 지영에게 한 손을 뻗어 해저로부터 함께 헤엄쳐나오는 장면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의 백미다.

대학 동기가 그를 똑 부러지고 당찬 학우로 기억했던 것처럼, 지영은 주연처럼 꿈과 희망, 그리고 찬란한 미래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양주연 감독은 평범한 대학생 지영이 스스로 생을 단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감독은 단순히 가족의 아픔을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모의 삶을 통해 여성들의 존재가 얼마나 쉽게 지워지는지를 묻는다.

감독은 그 질문을 마주하며 새겨지지 않은 고모의 이름을 조부의 묘에 새기는 것으로 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이로써 주연의 아버지도 몇십 년간 마음 놓고 부르지 못했던 누나의 이름을 다시금 불러보며 지영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선물한다.

한 시간이 넘게 펼쳐지는 고모를 향한 주연의 집착은 모두가 알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결국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하고 잠겨있던 수많은 양양을, 김양을, 이양을, 박양을 위시한 여성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해 뭍으로 꺼내 올린다. 40년 전 양지영이라는 여성의 존재를 각인함과 동시에, 오늘날까지 거듭해 망각되는 지영들을 세상에 호출한다. '양양'은 잊힌 이름을 불러내고 기록하는 강렬한 선언이다.

최소원기자 ssoni@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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