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받던 시절 해방구···'목포의 눈물'은 응원가

입력 2024.10.28. 08:54 유지호 기자

●2024 신한 SOL BANK KBO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KIA 타이거즈 1차전이 열린 지난 21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를 가득메운 야구팬들이 KIA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 타이거즈와 5·18

"공공 결사체의 기능을 어디서 하느냐? 스포츠가 합니다. 미국·영국에는 스포츠가 시민들의 일상이 돼 있죠. 지역 사람들이 얼굴을 보고 지역의 일을 논의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프로야구가 그걸 하지 못했고 그걸 금지시켰는데,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독재자들이 싫어했던 거죠."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

지난 2일 오후 3시 광주광역시 남구 빛고을 아트스페이스 소공연장. 스포츠칼럼니스트인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는 "다른 많은 스포츠 선진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스포츠 영역에서 공론장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스포츠를 통한 지역사회 네트워킹과 커뮤니티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금기어였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대표적이다. 일정 통제 등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 것이다. '신군부 등에 의해 5월 18일엔 광주에서 야구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국군기무사 문건 등이 드러나면서다. 실제 1999년까지 5월18일엔 광주에서 단 한 차례의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2000년에 이르러서야 무등야구장에 관중이 모일 수 있었다.

미국은 달랐다. 정 교수는 프랑스의 젊은 국회의원이자 학자였던 알렉시스 토크빌이 쓴 '미국의 민주주의'를 예로 들었다. 뉴욕 같은 경우 지역사회의 공공 결사체와 여론이 야구를 통해 형성됐다는 거다. 부모들이 야구장에 자연스레 모이면서 "선거 다가오는데 누구를 뽑아야 돼요" "우리 마을에 학교가 하나인데, 입주자들은 많아지는데, 지금 시장은 학교 세우는 데 관심 있어?" 등등. '스포츠의 추억, 도시의 기억 : 광주와 타이거즈' 주제의 강연에서다. KIA 타이거즈를 모티브로 한 다양한 문화적 현상을 톺아보는 자리였다.

영화 '스카우트'

스포츠계 인권침해 '광주정신' 소환 # 1

20여년 전, 도시와 야구를 둘러싼 추억과 기억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영화가 소환됐다. '스카우트'. 훗날 '무등산 폭격기'(해태 타이거즈), '나고야의 태양'(일본 주니치 드래건스), 국보급 투수로 불리며 야구계의 레전드가 될 선동열(당시 광주일고 3학년)을 두고 안암동 K대와 사활을 건 스카우트 전쟁에 나선 Y대 야구부 직원 호창(임창정)의 이야기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10일 전, 광주에 급파된 호창. 선동열 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그는 가삿일과 등산·목욕 등을 마다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로 한 17일 밤, 영화는 막을 내린다. 광주에서 옛 애인 세영(엄지원)과도 재회한 호창이 경찰서에 연행된 그녀와 함께 5·18 현장에 남게 된다. 축구선수인 꼬마 이종범에게 야구를 권하기도 한다. 민주화 운동의 심장부격인 금남로 광주YMCA 공터에서 축구를 하던 호창이 공을 잘 차는 한 소년에게 글러브를 주며 이름을 묻는다. 아이는 당차다. "종범인디요".

광주와 타이거즈는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까. 강연에 나선 정 교수는 "광주에서 스포츠가 일상이 되고 위대한 선수들도 많이 태어났는데, 그 모든 것을 '80년 광주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광주도 너무 좁아지고 스포츠를 사랑하는 시민들과 팬들의 다양한 열정이 협소해질 우려가 있다"면서 "광주와 KIA타이거즈는 40년 전 민주화운동으로, 기억이 과거로 가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 뭐가 고쳐져야 되나' 확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핵심적인 키워드로 '인권'을 꼽았다. 광주 정신은 인권이고, 우리 스포츠계에 꼭 필요한 것 또한 인권이란 거다. 정 교수는 "19세기도 아니고 21세기에 컨테이너 등을 아이들의 합숙소로 쓰는데, 이 곳에서 10명, 20명이 숙소로 사용한다"며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전국적으로 조사한 기숙사의 모습과 선후배 간 위계질서에 기반한 폭력 문화 등을 소개했다. 그는 "인권과 사회적 책무, 지속가능성 등을 중시하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많은 이야기들은 어쩌면 광주 정신과 닮아 있다"면서 "IOC가 진짜 그러냐 안 그러냐 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광주 정신과 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무등산 레전드, 해태 타이거즈' 연구 논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프로 야구 6개 팀 중 광주를 연고로 창단했던 해태 타이거즈가 최강의 구단으로 군림하던 시절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받는 전라도의 한이 서리고 응집되어 그 에너지가 '해태 타이거즈'라는 팀을 통해 폭발했다. 당시 상대적인 탄압과 차별을 받던 호남사람들에게 타이거즈는 홈런 타구처럼 끝 모르고 날아 오르는 희열이었고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이었다. 경기장 곳곳에서 시작된 '목포의 눈물'이 웅장한 합창으로 천지를 울릴 때, 타이거즈는 승리했다"고 분석했다.

●2024 신한 SOL BANK KBO 한국시리즈 1차전 삼성 라이온즈-KIA 타이거즈 서스펜디드가 열린 지난 23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KIA 팬들이 승리 기원 응원을 하고 있다. 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질곡의 역사 버팀목 서민들의 영웅 # 2

타이거즈를 이야기할 때 5·18은 빠지지 않는 주제다. 프로야구 출범이 '5·18 광주'의 상흔을 밟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의 우민화 정책과 무관치 않은 탓이다. 국면 전환과 이미지 개선. 5·18은 프로야구 탄생의 주요 모멘텀이 됐다. 광주에 대한 진상 규명 요구 등 국민들의 분노·불만을 잠재울 만한 '감정의 하수구'가 필요했다. 취약한 정통성은 내내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었다. 스포츠(Sports), 성(Sex), 스크린(Screen) 등 이른바 '3S'가 등장한 배경이다. 민주화 열망이 컸던 국민들의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 스포츠를 이용했던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80년 5월 금남로 분수대처럼 야구장은 해방구였다. 가슴 속 맺힌 한은 무등야구장에서 풀렸다. 분위기를 타서 승기를 잡을라 치면 어김없이 '목포의 눈물'과 '남행열차'가 울려 퍼졌다. '김응용'을 연호하다 '김대중'을 외쳤다. 처음 만난 이들도, 그렇게 하나가 됐다. 해태가 한국시리즈·플레이오프 등 중요한 경기를 하는 날엔 중국집 음식 배달이 마비된다는 농담도 돌았다.

해태타이거즈의 '검빨' 유니폼은 광주의 자부심이었다. 삼성·현대·LG 등 대기업 중심의 프로야구단 중 재정은 최악이었지만, 해태는 가장 강했다. 83년부터 97년까지 9차례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5·18의 도시 광주에서 프로야구가 스포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이유다.

정 교수는 "타이거즈 비공식 응원가 중에 '목포의 눈물'은 슬프다. 이겼을 때 부르면 '오늘 졌나?' 그런 느낌도 든다"며 "'이겼는데 왜 노래는 이렇게 슬플까' 이 노래의 아름다움과 역사성, 그리고 80년 광주, 고 김대중 대통령 등과 관련해 이 노래가 역사적 의미가 있으며, 남행열차도 마찬가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응원가의 슬픔에 깊게 배어 있는 광주·전남 지역민들의 집단적 기억은 5·18과 연결 된다"면서 "힘겹게 건너온 한 시대의 초상이고 어둡고 고단한 세월을 견뎌온 역사의 질곡이었지만, 특히 80년대 호남인들의 기억과 야구, 그리고 응원과 '목포의 눈물'은 다 연관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80년대 MVP로 선정됐던 한 선수의 일화도 소개했다. "팀은 이겼고, 경기 MVP가 됐고, 우승도 했고 그래서 광주에서 칵테일 파티가 있었습니다. 당시 해당 선수는 파티장을 나와서 호텔 뒤 작은 가게에 가서 혼자 라면을 먹으면서 울컥울컥 울었다고 합니다.우승을 했지만 우리만 즐거워하기엔 또 너무 슬픈, 그런 상황 속에서 라면 한 그릇 따로 혼자서 먹으면서 자기의 슬픔을 달래던 이런 선수들이 다 도시의 기억으로 함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의 한이 야구에 투영됐다는 분석도 있다. '해태 타이거즈' 연구 논문은 "어쩌면 프로구단의 연고지가 지역감정을 부추겼을지도 모르지만, 현실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였던 서민들에게 타이거즈 선수들은 자신들의 한을 대신하는 투사로 투영되기도 했다"면서 "이 같은 팬들의 구단에 대한 자긍심이 지금의 프로스포츠가 뿌리내리는 데 훌륭한 토양이됐다"고 밝혔다.

도시의 상흔 품고 지역 구심점으로 # 3

스포츠는 도시의 격렬한 감정의 역사다. 그 도시가 견뎌낸 역사적 압력과 정치적 실천의 정서적 흔적이란 거다. 정 교수는 "쇠락했었던 빌바오(스페인)의 경우 미술관 등 문화적 접목을 통해 지역 사람들을 하나로 모은 뒤 도시재생을 이뤄낼 수 있었다"면서 "스포츠와 지역 공동체의 결합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영국 선덜랜드와 리버풀을 예로 들었다. 선덜랜드는 클럽의 홈구장 이름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Stadium of Light)'다. 17세기 이후 산업혁명의 주 종목인 석탄산업의 중심지로 항구까지 끼고 있어서다. 그는 "'라이트'는 광산 노동자들이 갱도로 들어갈 때 그들과 그들의 소중한 가족을 지켜주는 랜턴을 뜻한다"며 "서녘 빛을 받는 메인게이트 앞에는 광부와 그 아내, 그리고 소중한 아이들이 서 있다"고 소개했다.

리버풀FC의 홈구장인 안필드의 사례는 일종의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재난이나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찾아 체험하면서 교훈을 얻는 여행)이다. 축구 도시인 리버풀에는 유명 선수들의 초상화가 거리 벽화로 그려져 있는데, 그 사이에 한 여성이 있다. 1989년 4월, 리버풀 팬들이 셰필드에 있는 힐즈버러 경기장에 원정 응원을 갔다가 무려 96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비극을 겪었다. 문제는 경기장 안전에 책임있는 경찰이 이 사고를 극성 팬들의 부주의 탓으로 돌리면서 불거졌다. 진상 조사를 원하는 유가족들을 당시 마거릿 대처 정부가 모욕까지 주며 무책임한 대응으로 일관했다.

정 교수는 "그 희생자 중 한 명인 15세 소년 어머니인 앤 윌리엄스를 중심으로 한 유가족들은 25년 간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을 벌였고, 마침내 2016년 4월, 그 동안 은폐되거나 축소된 사실들이 밝혀지게 됐다"면서 "리버풀 축구 팬들은 윌리암스를 거리의 벽화로 그리고, 축구 경기장에서 플래카드로 추모하고 기념했다"고 설명했다. 리버풀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에도 이 같은 의미가 내포돼 있다.

유럽처럼 스포츠가 도시의 상흔과 함께 한다면, 광주 경기장 이름도 바뀌었을 것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정 교수는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전제한 뒤 "광주의 스포츠 센터, 특히 야구·축구 경기장이 광주 민주화운동을 묘사해야 된다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면서 "그렇지만 유럽이었다면 진작 스타디움 이름은 5·18 경기장이었다"고 말했다. '스페인이나 영국에 광주라는 도시가 있었고 그런 비극에도 불구하고 지역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가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는 도시로서 존재 한다면'이란 단서를 달면서다.

지역사회에 착근한 스포츠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야구·축구 등 각각의 경기들은 그 특성에 맞게 감독들이 운영하는 거지만, 광주시와 구단들이 광주 정신이나 5·18 광주의 이야기를 밑바닥에 깔고, 그 속에서 여러 문화적 행동은 물론 지역 경제나 지역 공동체의 결합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면서 "(이렇게 가는 게) 광주와 전남이 추구하는 스포츠 정신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유지호기자 hwaone@mdilbo.com

안태균 수습기자 gyun@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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