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근의 잡학카페
매년 12월이 되면 한 해의 종착역에서 시간과 세월의 흐름을 의식하게 된다. 되돌아보는 1년의 여정은 마음속 시계에 따라 각기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더구나, 마음에 새겨진 감정의 색채가 삶의 시계를 빠르게도, 느리게도 움직이게 한다.
이처럼 시간의 속도와 흐름에 대한 다양한 사유가 있다. 공간의 변화가 곧 시간이라는 질문은 과학과 철학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래서 공간적 개념에서 시간적 개념이 유출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로 유출되었다. 이런 개념은 현대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이 나오면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의 독립변수가 아니라 종속변수임이 확고하게 되었다. 시간은 , 시간이 최고의 가치와 이성의 힘을 넘어 신의 자리가 되었다. 그래서 시간은 공간이 되어, 이제는 가장 소중한 가치이자 인간 이성을 뛰어넘어 신의 자리가 되었다.
한편 언어로서 시간은 순간, 한참 동안, 나날, 이따금, 당분간, 찰나... 등의 말이 존재한다. 12월 연말이 되면 "한 해가 순간적으로 지나갔다"라 한다. 이'순간'이란 아주 짧은 동안의 시간으로서 '눈깜짝할 순(瞬)과 사이의 간격'의 한자이다. 그런가 하면, 올해는'겁나게' 빨리 갔다. 이때'겁'은 인도의 불교 용어로서 무한한 시간으로, 산스크리트어인 칼파(kalpa)가 중국어로 겁파(劫波)로 표기하면서 '겁'이 우리에게 왔다. 겁은 고대 인도에서 우주의 시간을 재는 단위로 우주가 소멸하고 다시 탄생하는 시간의 주기를 말한다. '순간'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말이'한참 동안'이다. 옛날에는 국가의 통신과 이동 수단이 말이고 관리하는 곳이 역참(驛站)이었다. 한참은 한 역참과 다음 역참 사이의 거리이며, '한참 동안'은 이 거리를 말로 이동하는 시간이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계속 지속하는'선형적 시간'이다. 그러나 하루 24시간과 계절처럼 하나의 사건이 계속 반복되는 것은'순환적 시간'이다. 이런 순환적 시간의 출발점에 대해, 동양은 동짓날을 기준으로 해동지가 들어있는 달이 한 해의 시작이며, 고대 서구에서는 태양의 춘분점이 한 해의 시작이다. 또한, 이슬람 문화에서는 초승달이 한 달의 시작이다. 각 문화권에서 역사 이래 각각 다른 순환적 시간을 이용해 농어업의 생산과 생활에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시간은 문명이 깨어나는 첫 문이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옛말은 이제 퇴색했다. 오늘날 시간은 모든 학문의 뿌리이며, 세상의 모든 가치 위에 군림하고, 어떤 대가로도 바꿀 수 없는 금의 금이다. 그래서 모든 문화와 국가는 시간이라는 나침반을 따라 움직이며, 그 리듬에 맞춰 미래를 설계하고 항로를 그린다. 그래서 순환적 시간을 예측 가능하게 역력을 만든다. 국가의 황제와 왕은 천상의 원리의 시간을 깊이 살피며, 제사를 통해 백성들이 삶의 순환적 시간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한다
세종은 시간의 기준이 중국과 달라 조선에 맞는 천문학 이론, 관측, 계산법 등이 망라된 천문학 지식을 '칠정산'이란 역법에 체계적으로 담았다. 세종 이후, 조선에서 왕의 명으로 책 형태로 역서와 책력(冊曆)을 만들었는데, 이는 시간의 흐름의 일, 월, 뿐만 아니라 24절기와 예상한 강수량, 바람, 풍·흉년 등을 기록한 지침서이다. 이런 절기의 철을 모르는 고을 현감과 백성은 모든 농사를 망친다. 이 절기인 계절과 때의 철(계절)을 모르는 사람이 철부지(철不知)이다. 현재는 왕의 역할을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천체물리학자들이 다음 해에 일어날 천체 현상을 미리 계산하여'역서'라는 책자로 매년 발행한다. 반면, 오늘날 공동체의 리더는 구성원의 운명이 달려있는 최적의 시간, 때, 철을 결정하는 통찰의 총명함이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책력이다. 오늘날 공동체의 리더는 구성원들의 운명이 교차하는 시점에서 바람의 방향을 읽을 수 있는 총명성을 가져야 하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시간의 지혜인 책력이다.
농경시대 왕은 천문의 시간이 중요하듯, "오늘날 공동체의 리더는 오직 자가보존을 시계가 아니라, 구성원을 위해 적시에 울리는 알람 시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직 자기보존을 위한다면 공동체의 위기를 가져온다. 현대사회에서 이런 시간에 대한 잘못된 의식이 '철부지'이다. 이런 철부지에게 필요한 것이 지도편달이다. 지도편달이란 구성원이 철부지에게 회초리(편鞭)를 들고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하는 것이다. 지도편달이란 시계를 잃은 철부지에게 나침반을 들고 바른 길을 가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시간을 읽지 못하는 철부지가 공동체의 가치를 유지하는 정의의 나침판 역할을 거부하면 시간의 강물은 거꾸로 흐른다.
김용근 학림학당 학장, 창의융합공간 SUM 대표
- [문화칼럼] 시치미를 떼고 딴전 피우는 꺼벙이 놀이 ■김용근의 잡학카페모든 개인은 태어나면서부터 보이지 않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간다. 이 꼬리표는 사회가 정한 규범과 도덕을 지켜야 할 무늬를 새긴 것이며, 공동체의 뿌리와 정체성 지탱에 필요한 최소한의 표식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개인이나 집단의 잘못된 행동을 규제하고, 어떤 위치나 지위의 자리가 높은 만큼이나 이 꼬리표 크기도 커진다. 이 꼬리표는 누구나 알 수 있게 보이는 '시치미'이다. 시치미는 옷을 만들고 남은 조각천으로 바느질에서 여러 용도로 사용한다. 이 조각천은 삼국시대부터 유행하여 중국과 일본에 전파 시켰던 매사냥에서, 매의 다리에 묶어 놓는 표식이다. 이 표식은 색깔의 조합과 소유자 이름을 새겨 매의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표식하는 명찰이다. 다른 소유자의 매에서 시치미를 떼고 자신의 것이라 우기는 경우나, 자신의 매의 시치미를 떼고 남의 닭을 사냥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관가에서는 시치미를 떼는 것을 금하였다. 이런 행위에서 유래한 말이 바로'시치미를 떼다'인 것이다.특정 문화에서 꼬리표인 '시치미'처럼 공동체가 추구하는 도덕적 가치와 정체성을 반영한다. 시치미는 개인이나 집단의 권력 구조에서 정의롭고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감시하는 표식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책임의 시치미를 외면할 때, 공동체의 등불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구성원과 저항하는 정적에게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공동체의 손에 쥐어진 권력이 시치미를 떼는 순간부터 비극의 서막이 열린다.그래서 시치미의 역할은 윤리적 규범을 제공하며,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유지해준다. 이 시치미는 사회적, 문화적, 윤리적 맥락 속에서 올바르게 반영되는지를 공동체가 감시하는 중요한 전광판이다.시치미를 떼고 자신의 공동체를 돌보지 않고, '딴전'을 피우는 비극만큼 집단의 불행은 커진다. '딴전'에서 '딴'은 딴짓, 딴판, 딴청 등과 같이 '다른'을 의미하고, '전'은 어물전, 포목전, 종이 지전 등과 같은 가게를 의미한다. 그래서'딴전 피운다'라는 말은 자기 가게를 돌보지 않고 딴(다른) 가게가 잘 되는지, 손님이 많은지를 지켜보는 것에서 유래했다. 딴전을 피운다는 것은 자신이 돌봐야 할 가게와 가족, 공동체라는 정원을 방치하는 것이다. 이는 남의 정원에 핀 꽃을 시샘하면서, 스스로 자기 정원을 버리고 가상의 정원에 사는 일이다. 그것은 메아리처럼 남의 말만을 반복하다 사라지는 '에코'의 운명과 닮았다. 에코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면, 내면과 우리 안의 정원의 숲은 메마르고 남의 그림자만을 좇는 가상의 공간에서 공허한 여정이 될 뿐이다.에코의 딴전은 공동체라는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잎사귀처럼, 자신의 실존을 바람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비극이며 심리적 죽음 상태이다. 딴전 피우는 에코 같은 권력자나 지배자는 공동체를 허약한 뿌리로 만들어 메마른 정원을 남긴다.시치미를 떼고 딴전 피우는 것은 어리석은 미성의 '꺼병이'와 같다. 꿩의 성체인 수컷의 '장끼'와 암컷의 '까투리'가 아직 안 된 '꺼병이'는 다리가 길고 어벙하고 어색하게 행동하는 등의 미성숙한 꿩의 이름이다. '엉성하다'는 뜻으로 파생된 '꺼벙이'도 표준어이다. 꺼벙이는 성숙한 의식과 이타적 사고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채,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보존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미성숙의 상징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리더가 꺼벙이가 되면 그 미숙함은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며, 그로 인해 주변의 모든 존재는 고통을 겪게 된다.공동체의 리더는 맡겨진 역할과 책임이라는 시치미의 깃발을 내려놓지 말고, 우리를 외면하는 바깥바람의 딴전의 시선을 막아야 한다. 딴전에서 우리의 안에 희망과 행복을 위한 시선으로 옮겨야만 어리석은 '꺼벙이 놀이'가 멈춘다.리더는 자신의 자리에 걸맞은 무게를 견디고 책임이라는 시치미의 깃발을 굳게 세우는 것이 소명이자, 딴전을 가리는 든든한 벽이 되어야 한다.김용근 학림학당 학장, 창의융합공간 SUM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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