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중에 학생이 자주 고개를 숙였다. 과외는 나의 주 수입원이다. 최근에는 프랑스인 학생도 늘었지만 한국 학생과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수업도 있다. 시차 때문에 온라인 수업은 한국시각으로 밤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시선이 흔들리며 단발머리가 빗각으로 쏟아지는 게 아무래도 학생이 딴 데 정신이 팔린 것 같다. 곧 끝나니 집중하라고 주의를 주려는데 학생이 소리쳤다.
"선생님, 계엄령이 선포됐대요!"
친구에게 메시지를 받았다며 학생이 노트북 화면 아래 숨겨 두었던 핸드폰을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친구와 문자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뭘 들은 거지? 계.엄.령.선.포.라니 귀가 의심되는 단어였다.
"뭐라고요? 전쟁이 났다는 건가요? 헛소문이겠죠. 비트코인이라도 사야 될까요? 에이, 때가 어느 땐데... 자자, 남은 부분 얼른 합시다. 빨리 끝낼게요!"
충격을 누르고 어찌어찌 수업을 마쳤다. 학생에게 질문이 있는지 물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오늘 수업은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선생님."
나는 학생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안다. 비현실적인 사건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당시 뭘 하고 있었는지 경우에 따라서는 냄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게 된다. 빨래를 개다가 티비를 켰는데 속보가 떴어요, 아침에는 핸드폰을 싹 걷어가니까 몰랐죠, 그날 급식에 나온 돈가스가 엄청 맛있었어요, 결혼한 딸네 집에 가다가 버스에서 들었어요, 산책을 하는데 시커멓게 먹구름이 몰려오더라고요 등등... 일상의 사소하고 감각적인 기억들이 사실과 정보에 기반한 서술 기억에 덧붙여져 입체화된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오랜 기간이 지나도 마치 어제 일처럼, 당시 감정마저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한국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불안해진다. 비록 몸은 멀리 있지만 보이지 않는 실이 마음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것만 같다. 수업을 마치고 편지를 가지러 가는 길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생각했다.
프랑스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사람이 살면서 겪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나는 겪었다. 그 끝에 이 나라 하방에 설치된 그물이 정말 튼튼하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이른바 사회안전망이 어떤 시스템으로 굴러가는지 배우게 되었다. 프랑스가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보다 우월하다고 찬양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부분에서 뛰어난 점이 틀림없이 있다.
프랑스로 이사 가서 살림살이 좀 나아졌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면 돈을 충분히 썼는지 반성하라는 우스갯말도 있다. 어차피 가난한 사람들은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사는 게 녹록치 않다. 그래서 돈과 권력에 그리들 집착하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 대다수 시민들은 소박한 행복이면 충분하다는 사실도 잘 안다. 쪼르르 달려와 목에 감기는 아이의 말랑한 팔뚝에 하루치 피곤을 녹여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학교가 안전하고, 일터가 안전하고, 거리가 안전하면 막대한 재산이나 막강한 권력이 없더라도 만족하며 살아갈 줄 안다. 이게 그리 어려운가. 안전해야 할 학교가 위태롭고, 안전해야 할 일터가 불안하고, 안전해야 할 거리가 위험하다면 사회는 금세 주저앉는다.
전쟁 중 폭격으로 무너지는 것 이상으로 파괴력이 클지도 모른다. 어쩌면 대통령이 나서서 대한민국이 파괴됐다는 사실을 '계엄령'이라는 방식으로 국민들과 전 세계에 알린 건 아닌지 싶다. 막강한 권력을 갖고서도 계엄이라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더라고 본인의 무능을 시원하게 까발린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한국으로 돌아가 거리에서 머릿수라도 채워야 하나... 불안한 마음을 알아채기라고 한 듯 전화가 왔다. 나보다 불과 몇 살 많은 언니인데 주변 사람들에게 엄마처럼 마음을 쓰는 친구이다. 그는 다시 거리에 나가야 될 것 같아 롱패딩이며 핫팩을 챙기고 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 끝에 내게 당부했다.
"한국이 흉흉해졌다고 괜히 돌아올 생각하지 마세요."
자신은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편안하길 바라는 마음이 전해진다.
최근 한국어를 배우려는 프랑스 학생이 늘었다. 내가 가르치는 프랑스인은 네 명이다. 레아는 BTS 아미(팬클럽)이고, 조바나는 K드라마 팬이어서 발음이 나보다 정확하고, 물리학도 레온은 라틴어 대신 교양으로 한국어를 선택한 대학생이고, 꼬맹이 알렉상드르는 아빠가 한국 음식 좋아하는 치과의사인데 온 가족이 한국으로 여행을 갈 거라고 한다. 여고생 레아는 사진을 전공할 계획인데 나중에 사진작가나 언론인이 되어 한국에서 일하게 되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하면서 BTS 제이-홉도 만나고 한국여행도 실컷 하면 얼마나 좋으냐고... 이 학생들이 '계엄령'에 대해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하나. '계엄령 아래 한국여행 꿀팁' 같은 것을 알려줘야 하나?
1. 정치 집회, 시위, 결사 등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여행 중 한국인과 만남을 금한다.
2. 서툰 한국어 실수가 가짜뉴스, 허위선동으로 간주될 수 있으니 한국어를 금한다.
3. 가이드북 등 모든 출판물에 계엄사령부 검열 직인이 찍혀 있는지 확인한다.
4.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게으른 여행 행위를 금한다.
5.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계엄법에 의한 처단 대상자이므로 여행 중 불상의 의료인을 만나면 피한다.
그나저나 프랑스어로 계엄령이 뭐더라.
시난고난 타향살이에 대한민국이 한 숟가락씩 보태주어 과외학생도 늘어나 감사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소개할 우리나라 자랑거리가 자꾸자꾸 늘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아침시평] AI 대전환 시대, 글로벌 중추국가의 선결 조건 2025년의 신년 키워드를 '불확실성과 불안정 속에서의 희망 찾기'로 간추려 본다. 불확실성이란 거래형 리더십의 달인인 트럼프의 2기 행정부 출범에 따른 국제정치와 글로벌 경제 체제의 혼란에서 기인한다. 세상을 흔들 만한 신기술의 부상과 지구촌에서의 전쟁과 테러 위협은 불안정성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 핵심 동인은 미·중 패권과 경쟁 구도의 변화다. 우리의 위상에서는 기존 체제나 판이 흔들릴 때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전략에 방점을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내의 발 빠른 대기업들은 공급망 변경에 앞서 이미 미국에 대한 직접 투자를 확대하고 있음이 그 방증이다.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수출주도국이라는 지난 60년의 명성을 지탱해 온 과거 정책을 가다듬고 새로운 전략을 찾아야 할 때에 이른 것이다.지난 1월 초순 글로벌 경제와 산업계를 달궜던 'CES 2025'가 막을 내렸다. '몰입(Dive-in)'을 주제로 AI 대전환 시대를 열었던 혁신의 축제는 이제 치열한 시장으로 이어질 기세다. '기술로 인류사회를 연결하여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찾는다'는 슬로건은 우리를 설레게 하지만 여기서 버텨내지 못하면 도태나 종속밖에 없다. 약육강식의 정글 속에 들어온 것이다.올해 CES는 AI 반도체를 두고 각축을 벌인 한국·대만·일본의 혁신 삼국지가 그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서 벌인 일전에 비유할 수도 있다.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은 개인이 양자컴퓨터를 활용하는 시기를 20-30년 후로 예측했다. 이 기간 안에 선진 중추국가로 자리를 굳힐 것인가 아니면 그 자리를 내어줄 것인가는 전적으로 AI 기반 신산업의 주도권 확보 여부에 달렸다. 글로벌 빅테크들은 제약· 바이오와 의료·헬스케어 분야에서 연구와 임상, 신약 개발 등에 활용되는 AI를 앞다퉈 출시하는 추세다. 미국은 AI 반도체의 생산과 수출은 물론 국가별 수입 상한제 시행을 발표했다. 한국은 동맹국에 포함되면서 제약을 받지는 않겠지만 공급망 재편을 비롯한 전략적 대응은 여전히 필수 과제일 수밖에 없다. 우울한 상황 속에서도 AI를 기반으로 양자 컴퓨팅과 에너지 전환 기술이 그 뒤를 이을 신산업의 동력으로 떠오름은 새로운 희망이자 기회다.이처럼 경제와 안보의 중심에 AI와 반도체, 그리고 에너지 시스템이 자리한다. 하지만 기업의 성패, 국가의 존망이 달린 약육강식의 판을 놓고 볼 때, 우리의 미래 준비는 어떤가. 기술패권 시대에 이념 논쟁에 몰입해 있는 대한민국. 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안에서는 같은 땅 딛고서 둘로 나뉘어 원수처럼 싸워댄다. 이념이 모든 사안과 가치를 빨아들이는 이념 과잉 사회에 매몰돼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운 형국이다.사고방식과 역사관과 가치관이 이념을 지배해야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거꾸로 이념이 모든 것 위에 버티고 있다. 소모적이고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새로운 분노를 부추기면서 국민 화합을 방해하고 있는 게 실상이다. 오늘날의 이념 논쟁은 조선의 성리학 논쟁과 다를 바 없다. 왕조시대의 군주든 민주 국가의 국정 책임자든 나라를 지키고 백성과 국민을 배불리 먹이는 부국강병, 국태민안은 불변의 명분이어야 한다.그 목표인 혁신 강국으로 우뚝 서려면 脫이념의 여정을 걸어야 한다. 탈이념이란 이념의 낡은 탈을 벗어버리는 혁신의 과정이다. 왜 이념의 혁신을 두려워하는가. 더욱이 혁신이 제대로 성과를 거두려면 脫규제가 전제될 때 비로소 가능한데 정책이 이념의 볼모가 되어 있어 효과가 드러나질 않는다. 이념이 경제와 사회를 지배하던 시기는 이미 20세기 말에 종언을 고했다. 이제는 과학기술이 그 자리를 대체했으므로 미래 트렌드와 시대정신을 읽은 지도자를 가진 나라가 패권국이 됨은 당연하다. 냉엄한 현실주의적 인식이 요청되는 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정치가 경제를 이끌던 과거 패턴을 수정하지 않으면 미래가 암울하다. 해법 없는 저출생과 지방소멸,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 소비 위축 속에 올해는 1%대의 저성장에 머무를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다. AI 대전환 시대에 희망찬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역동성을 찾아 나설 때다.푸른 뱀의 해, 긍정적 의미에서 뱀은 치유와 화합의 상징성도 지닌다고 한다. 이념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사색하는 선진 시민의 시대가 열리길 소망한다.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으로서 성찰과 사유야말로 특권이기 때문이다. 국민을 따뜻하게 진무(鎭撫)해 줄 철학이 아쉬운 세밑이다.
- · [아침시평] 뱀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것은
- · [아침시평] "을사년 새해 대한민국 국격 추락의 회복을 기대하며"
- · [아침시평] 청소년 딥페이크 성범죄에 대처하는 방법
- · [아침시평] SNS와 확증편향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