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을 배반하고 경제를 나락으로 내몬 친위쿠테타를 주도한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장관을 비롯한 가담자들은 두말할 것 없이 나쁜 사람이다. 문제는 이런 나쁜 사람이 '자신이 믿지 않는' 공정한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국정을 일차적으로 책임지는 대통령을 뽑는데, 실상 후보자의 생각과 비전도 모르고 뽑은 것이다. 지나치게 짧은 후보 선출과 공식 선거 기간으로 인해, 후보자 간 상호검증이나 언론과 유권자에 의한 검증이 실효성을 가지기 어렵고, 결국 연출된 후보자의 이미지가 당선에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된다. 후보자 선출과 공식 선거 기간의 확대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박상인이 "위기의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의 경향신문(2025년 1월 3일) 칼럼에서 한 말이다. 옳은 말씀이다. 대다수 국민에겐 청천벽력 같았던 12·3 계엄을 저지른 윤석열을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이걸 따져 묻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국민의힘(국힘)과 보수 유권자들의 책임을 묻는 주장이 많다. 그게 전부일까? 구조나 제도 이외에 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없는가?
있을 것 같은데도 그걸 거론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나는 이건 문제가 있으며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게이트키핑(gatekeeping)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게이트키핑은 언론학에선 뉴스를 생산하는 기자나 편집자에 의해서 뉴스가 취사 선택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어떤 분야에서건 문지기의 역할을 거론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기엔 검증도 준비도 안 된 사람이었다는 데엔 거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 같다. 그 책임을 윤석열의 소속 정당이 져야 한다는 건 당연하지만, 국힘은 2차 게이트키퍼였다고 보는 게 옳다. 상식의 수준에서 생각해보자.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을 지낸 사람이 대선에 출마하려고 한다. 검사 출신, 특히 검찰 고위직 인사가 다른 경험 없이 곧장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건 위험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윤석열의 경우엔 그런 반론이 많이 있었다.
타당한 반론이지만 그 누구도 윤석열이 12·3 계엄과 같은 날벼락을 때릴 가능성을 생각하진 못했을 것이다. 막상 계엄이 저질러지고 나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건 사후확신 편향(hindsight bias)에 지나지 않는다. "사후 평가는 늘 정확하기 마련이다"는 명언이 괜히 나왔겠는가.
우리는 전혀 모르던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에 그 사람이 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게 꼭 바람직한 건 아닐망정 빠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 현대적 삶에서 불가피한 면이 있다. 우리는 이념과 정치적 성향에 따라 편가르기를 하면서도 공적 조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능력과 자질에 대해선 공통된 것이 있다는 합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합리적 인성을 갖고 있지 못한 폭군 성향의 사람은 걸러내는 게이트키핑은 편가르기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윤석열을 서울중앙지검장·검찰총장으로 발탁한 주체는 누구였나? 문재인 정권이다. 윤석열은 어떤 검사였던가? 윤석열은 대통령이 되기에 부적합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중앙지검장·검찰총장이 되기에도 부적합한 사람이었다. 1차 게이트키핑에 큰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윤석열이 어떤 검사였는지는 널리 공개된 비밀이었다. 인사 검증에서 심각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였음에도 문 정권은 그 문제에 대해 눈을 감아버렸다.
한국일보 기획취재부장 강철원은 "윤석열 스타일은 바뀌지 않는다"는 제목의 한국일보(2020년 2월 24일) 칼럼에서 검찰 안팎에선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윤석열 스타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설정한 뒤 결론을 정해 놓고 수사한다',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무지막지하게 수사한다', '목표에만 집착해 절차를 무시하고 인권을 등한시한다', '수사의 고수들이 깨닫는 절제의 미덕을 찾아볼 수 없다', '보스 기질이 넘쳐 자기 식구만 챙긴다', '언론 플레이의 대가이자 무죄 제조기다' 등이다."
이걸 문 정권이 몰랐을까? 그럴 리 없다. 문 정권은 윤석열에게 따라붙었던 '칼잡이'라는 별명을 가장 반겼을 게다. 오로지 '앞으로 진격' 밖에 모르는 칼잡이라니, 어찌 반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당시 포스텍 교수 송호근이 "최종병기, 그가 왔다"는 제목의 중앙일보(2019년 6월 24일)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윤석열은 "국정농단, 사법농단 잔재세력의 완전 소탕"을 해낼 수 있는 "적폐청산의 최종병기"로 선택된 게 아니었느냐는 말이다.
강철원은 "스타일을 지적하지 않고 사람을 믿은 정권이 순진했을 뿐이다. 기가 막힌 운명으로 역사에 남을 것 같다"는 말로 칼럼을 끝맺었다. 순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불순했다고 보는 게 더 옳을 것이다. 문 정권의 입장에선 그런 스타일이 적폐청산엔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거라는 점에서 말이다. 윤석열 검찰의 적폐청산 수사는 전반적으로 가혹했고 잔인했다. 그럴수록 문 정권의 지지율은 올라갔다. 그러다가 검찰의 칼끝이 '구 적폐' 뿐만 아니라 문 정권의 '신 적폐'를 향하자 문 정권은 광분했다. 똑같은 검찰이었건만 상대편을 칠 땐 환호하고, 자기편을 칠 땐 '검찰 쿠데타'라며 펄펄 뛰는 내로남불 추태였다.
문 정권은 1차 게이트키핑에 실패한 정도를 넘어서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 만들기'에 기여함으로써 역사에 큰 죄를 지었다. 문 정권 인사들은 정략적인 '윤석열 찬양가'를 불러대다가 자신들을 건드리는 '신 적폐청산'이 이루어지자 무리한 '윤석열 때리기'로 윤석열의 인기만 높여 주었고 급기야 유력 대선 후보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만들었다.
윤석열에 대해 북 치고 장구 친 건 민주당이었다. 국힘은 그 장단을 이용해 윤석열을 '용병'으로 써 먹어 대선에서 승리했다. 윤석열에 대한 검증을 두고 말하자면 민주당이 더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게 아닐까? 이건 중요한 문제다. 집권 가능성이 높아진 민주당의 가장 큰 문제는 성찰 능력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윤석열에게 10개의 돌을 던지더라도 1개쯤은 자신을 위해 남겨두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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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易地思之'] 늑장재판의 고통에 둔감한 사법부 "사법부 신뢰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이고, 대법원이 검찰과 함께 경찰보다 낮은 신뢰도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사법개혁은 없다."(세명대 교수 이봉수, 경향신문 2021년 2월 9일) "(영국의 레가툼 번영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사법체계와 법원에 대한 신뢰도는 전체 167개국 가운데 155위로 거의 바닥을 찍었다.... 이런 불신에도 한국은 법조인들이 점령하는 국가가 돼 가고 있다."(서울대 교수 한숭희, 경향신문 2023년 5월 11일)이렇듯 사법부 신뢰도가 바닥을 기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늑장 재판이다. 헌법 27조 3항은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현행법은 민사소송은 1심, 항소심 각각 5개월 이내에, 형사소송은 1심 6개월, 항소심 4개월 이내에 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직선거법 270조는 "선거범 재판의 선고는 1심은 공소제기 후 6개월, 2심 및 3심은 전심 선고 후 각 3개월 (합계 1년) 이내에 반드시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다 말이 그렇다는 것일 뿐 믿을 게 못 된다.재판 지연은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2017년 9월~2023년 9월)에 악화됐다. 그의 대법원장 취임 이후 1심에서 1년 넘게 처리되지 못한 재판이 급증했으며, 민사는 65%, 형사는 68% 늘어났다. 2022년 대한변호사협회의 설문조사에 응답한 변호사의 약 90%가 최근 5년간 재판 지연을 경험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김명수가 사법 민주화라면서 도입한 법원장 후보 추천제와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 폐지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법원장 후보 추천제는 각 법원마다 소속 판사들이 투표를 통해 법원장 후보를 복수로 선출하면 대법원장이 한 명을 법원장으로 임명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법원장이 자신을 뽑아준 후배들 눈치를 보느라 사건을 빠르게 처리하라고 지시하는 게 어려워졌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는 판사들이 업무에 매달리는 대신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게 만들었다.그러나 김명수는 퇴임 직전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재판 지체'가 심각해진 것은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취임사에 밝혔던 것처럼 신속과 효율도 중요하지만 충실한 심리를 통해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재판을 하려고 했다"며 "(변호사 출신 등) 경력 법관들이 늘면서 예전처럼 사명감과 열정만 갖고 일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고 법관 수도 부족하다. 코로나로 재판이 정지되는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재판이 지연됐다"고 했다.하지만 '워라밸'의 영향은 인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법원행정처와 법원공무원노조는 '워라밸' 촉진을 위해 '오후 6시 이후 재판 자제' 정책추진서에 합의하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법에선 평판사들이 부장판사들에게 '한 달에 합의부 사건은 2~3건만 선고' '배석판사가 쓴 판결문 수정은 한 번만 할 것' '배석판사와의 합의(논의)는 일주일에 두 번만 할 것'이라는 요구 사항을 전달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 부장판사는 "의욕적으로 하려는 판사는 모난 돌로 찍혀 정 맞는 분위기"라고 했다.(조선일보, 2021년 5월 21일)'워라밸'은 판사를 비롯한 법원 노동자들의 복지·인권 향상에 기여한 것이니, 김명수가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 업적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우리 사회는 2-3년마다 이사해야 하는 판사들의 고충에 너무 둔감하다. 그들의 처우 개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워라밸'로 인해 심해진 재판 지연의 해소를 위해 어떤 다른 대책을 강구했으며, 그걸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느냐는 점이다.소송이 길어지면 당사자들은 큰 고통을 겪는다.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는 건 물론이고 생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판사들이 법정에 들어가서 가장 자주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든 제발 빨리 좀 끝내 주세요"다. 피가 마를 지경이라며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법부와 국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사법정책연구원의 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법관 1인당 민·형사 본안 사건 수는 독일의 약 5.17배, 일본의 약 3.05배, 프랑스의 약 2.36배다. 재판 진행 속도를 높일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판사 증원'이지만, 다른 공무원과 달리 판사와 검사의 증원은 '각급 법원 판사 정원법'(3,214명)과 '검사정원법'(2,292명)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법을 개정해 늘리면 되지만, 여야의 정략 대결에 발목이 잡혀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래서 법관 정원은 2014년부터 10년째 3,214명으로 묶이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국회만 나쁜가? 사법부에겐 문제가 없는가? 혹 독자들 중엔 국민의 고통을 외면한 국회의 한심한 직무유기 작태에 판사들이 집단적으로 분노를 표했다거나 비판을 퍼부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게다. 좋게 말하자면 사법부는 너무 점잖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재판이 지연돼도 오후 6시에 칼퇴근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그런 상황에서 새 대법원장 조희대는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지는데도 법원이 지키지 못해 국민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2023년 12월 11일 취임사)고 했다. 그가 재판 지연이 국민적 사법 불신의 원인이 될 정도로 심각해졌다는 걸 깨달은 건 박수를 칠 만한 일이지만, 진행 속도가 느리다는 점에서 아쉽다. 2024년 12월 10일 판사 정원을 현행 3,214명에서 3,584명으로 총 370명을 2025년부터 2029년까지 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증원하는 내용의 '각급 법원 판사 정원법 일부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건 반길 일이지만, 증원 숫자가 적다는 점에서 아쉽다.사법부는 어느 언론인이 던진 다음 질문을 뼈 아프게 받아 들이면서 부디 많은 시민들이 겪고 있을 늑장재판의 고통에 대한 둔감함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공직선거법 재판에서 신속한 판결을 위한 소위 '6·3·3 원칙'을 안 지킨 판사에게 그에 해당하는 12개월(6+3+3) 동안 전액 감봉 처분을 하는 법 개정안을 내놓으면 여론이 어떻게 움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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