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궤구고두례
김목(동화작가)
무릎을 꿇는 것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의 행위이다. 또 주먹으로 탁자를 치는 자에게 고개 숙이고, 무릎을 꿇은 모습은 군주시대의 신하와 패전의 장수만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권력자 앞에 지나치게 바싹 허리를 굽히는 걸 티브이 뉴스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헌법에 명시되고,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며 사법부의 3심 판결까지는 무죄 추정의 보호를 받는다. 그럼에도 모두가 예비 범죄자라는 망상을 가진 자도 있다. 털면 나온다며 압수수색에 주변 사람까지 먼지 훑듯 샅샅이 뒤지기 때문이다. 지은 죄가 없어도 뜻 모를 공포로 눈치를 살피는 연유이기도 하다.
누군들 잘못이 없는데도 두 무릎을 꿇고 싶겠는가? 하지만 민초라고 하는 우리 서민이 권력과 재력에 무릎을 꿇는 것은 무서워서가 아니다. 내일은 뭔가 달라지겠지, 조금은 좋아지겠지 하는 희망, 바로 예측 가능한 그 미래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허망한 꿈일지라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두 무릎을 꿇는 이유라는 걸 권력과 재력을 가진 자들이 알아야 한다. 누리는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오고, 소유한 재화는 한정적이며 총량 불변적인 것도 명심했으면 한다.
잠시 조선의 인조 왕 시대로 가본다. 앞서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될 때 명의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광해군은 후금의 누르하치 세력이 커지는 것에 중립 외교정책을 폈다. 하지만 반정에 성공한 인조와 서인 정권은 기고만장하여 친명배금정책을 명분이라 했다. 결국, 후금의 제1차 침략인 정묘호란을 초래하였고 패배하였다. 하지만 무능에 과대망상까지 겹친 정권은 반성할 줄 모르고 배금정책을 이어가다 제2차 병자호란을 불렀다.
병자년인 1,636년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홍타이지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짓밟아 7일 만에 인조가 몸을 숨긴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이때 최명길 등의 주화파와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 삼학사를 비롯한 주전파의 논쟁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준비도 제대로 못 하고 왜란 때와 달리 의병 봉기도 거의 없었던 조선 조정은 권력 쟁취의 다툼에만 빠져 40일 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인조는 한강 삼전도 나루터에서 홍타이지에게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례를 올렸다. 왕은 인간에게는 그 누구라도 고개 숙이지 않는 자리였으니 참으로 이보다 더한 치욕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근대에 일제강점기의 치욕과 군사쿠데타까지 겪었으나, 이제 세계가 부러워하는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도무지 믿지 못할 거짓말 같은 사실이 현실이 되었다. 지난해 12월 3일 밤을 티브이 앞에서 뜬눈으로 세우게 한 계엄령과 내란의 폭동 장면은 모든 일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해를 넘겨 1월 3일에도 이른 아침부터 대통령 관저의 어이없는 행태를 티브이 생중계로 지켜봐야 했다. 그렇게 초법적인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일상이 된다면 더 이상 무엇이 끔찍한 일일까 싶다.
민주주의는 법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공정과 상식이 무너진 사회는 미개 후진국이다. 누군들 무릎을 꿇고 싶을까만, 법과 원칙을 훼손한 자는 삼궤구고두례도 아깝다는 생각에 새해가 됐어도 기쁨보다 슬픔이 가슴을 짓누르고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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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법률 제정보다 실행의지와 자세가 더 중요 얼마전 5·18 기념사업 기본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제기됐다. 국가를 '위한' 희생과 국가에 '의한' 희생이 구분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보훈체계는 독립, 한국전쟁, 민주화 과정에서의 희생과 공헌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독립과 한국전쟁이 국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라면 민주화 과정은 국가에 의한 희생이다. 그런 점에서 구분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청산의 원칙 중에 국제적 보편성을 갖고 있는 원칙이 '반 보벤의 원칙'이다. 국가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정의실현자라는 이중적 지위에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국가폭력이 자행한 인권유린에 대해 국가는 그 진실을 확인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와 명예회복을 해야 하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과거사에서 제주4·3항쟁, 부마민주항쟁, 그리고 5·18민주화운동이 저마다 성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국가폭력에 의한 국민의 희생이 발생한 대표적 사건이다. 이 중에서도 5·18은 사건 발생 이후 지금까지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대한 사회적, 제도적 노력이 지속되고 있는 대표적인 사건이다.5·18 기념사업 기본법 제정은 국가폭력에 의한 국민인권유린의 재발을 막기 위한 국가의 의무 중에서 기억과 기념의 장치와 제도를 규율하는데 그 목적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권고가 아닌 의무규정이어야 하고, 과거청산과 이행기 정의 실현이라는 뚜렷한 입법취지와 목적이 전제되어야 한다. 동시에 이념과 진영 대립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진실의 왜곡과 폄훼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장치와 제도가 포함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사회적 합의와 국민통합이라는 상투적인 과정을 넘어 사회적 공감과 이행을 이끌어내는 과정으로 추진돼야 한다.5·18 관련 법률의 제정은 한국사회의 불행했던 과거사의 진실 확인과 그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국가의 의무 이행을 이끌어내는 선도적 역할을 해 왔다. 선도적으로 법률을 제정하다 보니 한계와 문제점이 항상 뒤따랐고, 법률의 개정이 불가피했다. 5·18 관련 법률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피해자들의 보상과 피해자 단체의 지원에 관한 이른바 '보상법'이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유공자법', 그리고 진상규명 관련 특별법이다. 이 법률들마다 제정 당시 정치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 때문에 법 제정의 취지와 목적을 제대로 살릴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1988년 보상법은 당시 민자당에 의한 날치기 통과로 야당의 입장과 광주의 요구가 반영될 수 없었다. 2002년 유공자법 제정 당시에는 기존의 국가유공자 단체들의 극단적 반발로 정치권의 협상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요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제정해놓고 나중에 개정하면서 내용을 보완해가자는 전략적 선택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1994년과 2018년 진상규명 특별법 또한 여야 협상과 진상규명의 범위를 놓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정략적 이해 때문에 역시 적잖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법률들은 불행했던 과거사 청산에 대한 국가의 의무와 이행을 이끌어내는 제도와 장치를 선도해 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번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국가에 권고한 '5·18 기념사업 기본법' 제정 또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정의실현자로서의 국가가 이행해야 할 지위와 역할을 규율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불안한 한국사회의 이행기 정의 실현과도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이와 함께 토론회에서 제기된 5·18 정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필자는 '인권과 정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민주, 인권, 평화의 주제는 2000년 밀레니엄을 앞두고 5·18 20주년 기념행사 슬로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토론 없이 정해졌고, 이후 여러 학술대회 등에서 다뤄지기는 했지만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다. 5·18 정신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는 5·18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이라는 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충분한 논의와 토론이 필요하다. 필자는 국가폭력에 의한 국민의 기본권 유린이었다는 점에서 '인권'이어야 하고, 국가폭력의 실상과 그 책임자들을 단죄하기 위한 노력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 여정과 이행기 정의 실현의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정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마지막으로 법률의 제정도 중요하지만 광주시의 의지와 자세 또한 제정된 법률의 실행을 이끌어내기 위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광주시가 조례에 의해 5년마다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있지만 수립된 기본계획을 얼마나 실행했는지 되돌아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광주시는 더이상 5·18 기념사업을 치적과 보여주기식 이벤트에서 벗어나 국가의 의무 이행을 이끌어내기 위해 보다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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