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20 끝.에필로그(하)
동학농민전쟁서 이어진 ‘의병’ 정신
창의회맹소·호남의소·호남동의단 등
독자적 부대 이끌다 의진 연합 작전

동학 동민 전쟁부터 백성들은 스스로 나라의 위기를 인식하고 '의병'이라 칭했으며 이러한 정신은 한말 의병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 연구자들은 의병 운동이 조직상의 결함을 드러냈다고 폄하하지만, 남도 의병이 수년간 일본군과 대등한 교전을 벌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평소에는 소규모 부대로 유격투쟁을 벌이다가도 필요시에는 대규모 연합 의진을 구성해 전면전을 펼친 유연성에 있었다. 또 항전을 장기적으로 이어나가기 위해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의병부대들이 해체된 이후로도 3·1운동과 항일운동단체 조직, 무장독립 전쟁으로도 이어졌다.
무등일보와 한국학호남진흥원이 공동기획한 '남도 의병 열전'을 마무리 하며 한말 남도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하고자 한다.

◆ 동학농민전쟁의 활발한 재평가
최근 순천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군들을 어떻게 성격지을 것인가에 관한 국제학술세미나가 있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해 우리의 주권을 짓밟는 것을 본 백성들은 이를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국가 위기로 인식했다. 이에 신분을 떠나 하나가 돼 대일 항전에 나서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동학농민군들은 스스로를 '의려(義旅)' 곧 '의병'이라 칭했으며 '동학의병'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
전남은 일본군과 처절한 항전을 한 지역 중 하나다. 발표에 따르면 전남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치러진 전투만 50여 회가 넘는다고 한다. 장흥 석대들에는 며칠 동안 일본군과 밀리지 않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이들의 항전이 한말 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부에서 2차 동학농민전쟁부터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까닭이다. 최근 정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 대응하고 나선 것은 다행이다. 때마침 문을 여는 남도 의병박물관에 '2차 동학'을 별도의 공간에 넣어 그 역사적 의미를 살피고자 한 것은 긍정적이다.
◆의진 간 활발한 연합전선 펼쳐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은 한말 의병의 활동을 '운동'에서 '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전국 각지에서 고립적이고 외로운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한말 의병은 해산군인들의 투쟁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투쟁 방안을 모색했다. 이들은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진들과 연합 투쟁을 하거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서울 진공작전에 나선 13도 창의군의 결성이 그것이다.
한말 의병은 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의진 결합이나 연계하는 투쟁 전략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새로운 활동 목표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후기 의병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한 '창의회맹소'는 의진 간의 연합작전도 전개했다. 법성포 주재소를 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이 연합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1907년 12월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서, 김태원은 영광·나주·함평·무안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중요 전투에서는 서로 연합작전을 벌이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의진의 규모를 최소화하면서도 지역별로 유격투쟁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여러 차례 분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체포돼 순국한 이후에는 김용구와 김태원, 김율을 중심으로 분화됐다. 1908년 4월 김태원과 김율이 순국한 이후에는 심남일·조경환·전해산·오성술·안규홍·박도경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재편됐다. 호남창의회맹소의 분화 모습을 통해 회맹소가 합진보다 연합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정규군과 대등한 교전
심남일의 '호남의소'의 경우 1908년 3월부터 1909년 10월 9일 체포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23회나 헌병대나 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 순서를 보면 강진-장흥-나주-화순-나주-보성-영암-장흥 유치 등 전남 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전라도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안규홍·전해산·조경환 의병부대와 수시로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
전남 서부지역에서 활동한 전해산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심남일·이대극·안규홍 의병 등 11개 의병부대 약 2천명이 참여했다. 심남일이 연합의진 형성에 가장 적극적이었기에 '호남동의단'의 제1진이 됐다. 이것은 전기·중기 의병 때 분산적으로 활동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호남동의단'의 구성은 앞뒤에서 동시에 몰아치는 '기각지세'의 형성에서 의진 간 연합전선으로 전환해 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후기 의병 때 호남 의병들은 연합작전을 수행해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구체적으로 1909년 2월 치러진 남평 덕룡산 전투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당시 일본 기록에 의하면 박사화, 박민홍, 강무경이 인솔하는 250명의 의병이 덕룡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 군경과 3시간에 걸쳐 총격전을 벌였다. 박사화 의병부대가 심남일 의병부대의 강무경을 비롯해 또 다른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는 박민홍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호남의소'의 특징은 의병부대들이 강력한 의진을 구성해 일본군 정규군과 2년 가까운 독립전쟁을 치른 원동력이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1909년 호남지역 의병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
'1909년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래없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여러 의병 부대의 특성을 살펴볼 때, 이러한 주장은 실상을 모르고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장기항전으로의 전환 시도
앞서 1908년 13도 창의군이 결성돼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할 때 유인석은 이를 반대했다. 그는 전국의 의병부대가 서로 호응해 지구전을 전개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국내에서 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당시 의병의 역량으로는 일본 군사력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인석은 지구전 전략이 실패하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내륙 깊숙한 산중에 항일 무장 투쟁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다. 이러한 의병계열의 백두산 근거지론은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 기지론과 서로 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외 항일투쟁 근거지론과 함께 국내 근거지론이 대두됐다. 고광순이 주창한 지리산 근거지론이 그것이다. 앞장에서 간단히 살폈지만 그는 당장의 무장 투쟁보다는 장기 항전을 모색하기 위한 전략의 수립에 고심했다. 즉, 화력에서 압도적인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해 '축예지계' 즉, 장기항전에 대비해 일정기간 예기를 기른 후에 전쟁을 불사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국내에 항구적인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한 그는 지리산을 주목했다. 유인석의 중부 이북 의병들이 추진한 '북계책'과 비교된다.
고광순의 항전기지 건설 구상은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의병전쟁이 본격화될 때 이미 시작됐다.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07.음) 8월 11일 행군해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지로 삼아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해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를 기르는 계책으로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깃발에는 '불원복' 석자를 썼다.(행장, 녹천유고, 하)'
이러한 지리산 근거지론은 1908년 초 "하동군 북쪽 골짜기의 지리산은 의병의 소굴이 됐다"하고 하는 데서 살필 수 있다.
영암 국사봉을 의병 지휘본부로 삼아 치열한 의병 전쟁을 치른 심남일의 '호남의소'도 이러한 장기적인 항전 기지 건설과 연결돼 있다 하겠다. 국사봉에 근거를 둔 의병부대는 산상에 설치된 포대에서 포까지 발사함으로써 일본군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러한 의병부대의 장기적인 항쟁 전략이 이어지면서 의병 전쟁은 일본 정규군의 엄청난 진압 작전에도 밀리지 않은 독립전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값진 희생, 3·1운동으로 이어져
한편 의병들은 3·1운동 때 적극 참여했다. 심남일 의병부대 도통장으로 활동하다 3·1운동을 주도한 남평 출신 김도숙은 의병 수뇌부가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최익현 의병에 참여했고 독립의군부에서 호남유사를 맡았던 김종주는 낙안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헌병의 칼에 찔렸음에도 저항해 호남 의병의 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줬다. 영암 구림 3·1운동에 앞장섰던 군서 출신 정상조는 '영암 의병' 출신이었다. 역시 '영암 의병'이었던 금정 출신 민치도는 3·1운동 후 화순에서 '독립국민당'이라는 항일운동 단체를 조직했다. 이러한 의병들의 참여는 더욱 격렬하게 이 지역의 3·1운동이 전개되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전남 의병들이 흘린 피로 전남의 온 산하는 붉게 물들었다. 이들의 빛나는 독립전쟁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를 늦추게 했다. 항쟁의 에너지는 응축돼 3·1운동, 그리고 무장독립 전쟁의 토대가 됐다. 특히 3·1운동, 광주학생운동, 농민 항일운동 등 수많은 독립운동의 현장에 전남 지역민이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전남 의병의 값진 희생이 밑거름된 것이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
국난 극복 향한 의지에 지역도 계급도 구별 없었다
쌍산의병 최초 결의장소
무등일보는 한국학호남진흥원과 공동기획을 통해 치열하게 의병운동을 전개했던 남도의 의병장들을 18차례에 걸쳐 재조명했다. 호남창의회맹소 맹주 기삼연, 호남의소 대장 심남일, 쌍산의소를 이끈 양회일,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등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들도 있었지만 다양한 부대를 돌며 참모로 활동한 권영회, 유병기처럼 물밑에서 활약한 이들도 존재했다. 이들의 빛나는 업적을 두 차례에 걸쳐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장성 무궁화공원에 위치한 기삼연 의병장 순국비.호남호국기념관 제공◆중기 의병을 알린 쌍산의소1894년 음력 6월 21일 일본군 육군 혼성여단 5천여 명이 조선 국왕이 있는 경복궁을 불법 점령했다. 일본군의 궁궐 침탈로 인해 당시 조선 백성들은 주권의 강탈을 인식했다. 이에 조선 정부와 폐정개혁에 합의하고 해산한 농민군들이 '동학 의병'을 자처하며 일본군과 물러서지 않은 일전을 벌였다. 그 중심 무대가 전남 지역이었다. 전남 곳곳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쟁을 벌인 전쟁터로 변모했다. 확인된 전투 장소만 50회가 넘는다. 2차 동학농민전쟁이 사실상 독립운동의 시초라는 주장이 나오는 까닭이다.이 같은 동학농민전쟁의 여파는 1900년대 중반 한말 의병활동의 기폭제가 됐다.중기 의병을 대표하는 쌍산의소(호남창의소)는 화순 쌍봉(쌍산)에서 유생 양회일 등이 중심이 돼 조직했다. 능주·화순을 중심으로 정읍·보성·남원 출신들이 주로 참여했다. 을사늑약 이전부터 거의를 준비했던 양회일은 태인 의병이 해산되자 거병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양회일은 고광순, 기삼연과 만나 각기 출신지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이광선·노현재·임창모 등 200명으로 의병부대를 구성했다. 쌍산의소에서 1906년 10월부터 1907년 3월 초까지 6개월간 의병들을 훈련시켰다. 선봉-중군-후군의 3군 체제와 3군이 포군과 보군으로 구성한 형태는 장성·태인 의병보다 진일보한 모습이었다. 양회일 부대는 1907년 4월 화순을 점령하기도 했다. 이후 양회일이 체포돼 부대가 해산되자 임창모는 안규홍, 유화국은 기삼연, 안찬재는 심남일 의병부대로 옮겨 이름을 떨쳤다. 쌍산의소는 보성출신 이백래가 일시적으로 1908년 다시 조직했다.고광순은 태인 의병에 참여하려다 좌절되자 1906년 음력 12월 11일 창평에서 그의 일족과 함께 독자적 의병부대를 결성했다. 남원, 능주, 동복 등 여러 곳에서 전투를 치렀고, 지리산 연곡사에서 의병 기지를 구축했다. 그가 이끄는 의병이 약 1천명이었으나 일본군과 수많은 격전을 치른 그는 1907년 10월 전사했다.고광순 의병부대의 '불원복' 태극기◆후기 의병의 중심, 호남창의회맹소호남창의회맹소(이하 회맹소)는 1906년 봄 영광의 김용구, 장성 기삼연이 조직한 일심계가 모태였다. 기삼연은 1907년 10월 장성 석수암에서 거병했는데, 50명으로 출발했으나 곧 400명으로 늘어났다. 나주 김태원, 장성 이철형, 함평 이남규 등 서부지역 의진들이 합류해 1907년 음력 9월 24일 기삼연을 맹주로 하는 회맹소가 결성됐다. 대장-통령-참모-종사-선봉 -중군-후군 등 조직체계도 정비됐다.여기에는 기정진 문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특히 기삼연은 전기 의병 때 의병해산 조칙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해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강원도와 경상도 의병부대와 연대를 모색했으며 친일 조직인 일진회와 자위단 회원 제거와 납세거부 투쟁, 수입품 불매운동 등 주민들의 생존권을 우선시하는 모습도 보였다. 역둔토와 궁장토의 토지세(도조)를 돌려달라는 주장도 내세웠으며 '포고만국문'을 각국 공사관에 보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외교 교류를 꾀하기도 했다. 외세를 무조건 배척하자는 주장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새로운 활동 목표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후기 의병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한 회맹소는 의진 간의 연합작전도 전개했다. 법성포 주재소를 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 연합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1907년 12월 기삼연은 장성·순창 지역에서, 김태원은 영광·나주·함평·무안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으며 중요 전투에서는 서로 연합작전을 벌이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의진의 규모를 최소화하면서도 지역별로 유격투쟁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이같은 분화 모습을 통해 회맹소가 합진보다 연합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기삼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회맹소는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체포돼 순국한 이후에는 김용구와 김태원·김율을 중심으로 분화됐다. 이후 1908년 4월 김태원과 김율이 순국한 이후에는 심남일, 조경환, 전해산, 오성술, 안규홍, 박도경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재편됐다. 1909년 이후에는 대부분 평민출신 의병장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전의 유생 출신 의병장들이 대거 전사, 체포, 부상당한 데다, 일제의 침략 정책이 노골화되며 삶의 위협을 느낀 백성들이 의병에 대거 합류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함평군 월야면에 위치한 남일심수택의병장기념관◆지리산을 무대로 한 삼남창의소'폭도의 수괴 김동신과 고광순은, 전라남북도에서 폭도의 선구자였다'는 일본 측 기록이 있다. 회덕 출신 김동신은 1907년 음력 8월 초 내장산 일대에서 80명으로 거병한 후 지리산 문수암 일대를 근거로 삼으며 활동했다. 지리산에 가옥을 짓고 장벽과 방책을 세우는 등 의병들의 항쟁기지를 구축하려 했다. 선봉-중군-후군의 전통적 삼군체제였으며, 충청·경상·전라도 등 3도 출신이 많았다. 주도층은 양반 유생이었으며 병사층은 농민과 산포수·행상 등이 많았다. 의병부대 규모는 800명에 이르렀으나 다양한 인적 구성으로 인해 학문적 동질성이나 지역적·혈연적 기반이 미흡해 결속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김동신 부대는 지리산을 근거로 전북, 전남, 경남 일대에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1907년 9월부터 1908년 6월까지 거의 1년 가까이 활동했다.1907년 9월 지리산으로 이동해 김동신과 연합작전을 시도한 고광순 부대는 일본 군경과 전면전을 하기보다 군사력을 기른 후 대일항전을 벌이자는 장기항전 전략 '축예지계(蓄銳之計)'를 세웠다. 의병 전쟁의 새로운 양상이다.보성군 벌교읍 선근공원에 있는 안규홍 의병장 동상◆의병 연합전선 호남동의단전해산은 장성·영광을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을, 심남일은 주로 남부 지역을, 안규홍은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전쟁을 치렀다. 전해산과 심남일이 유생 출신이라면, 안규홍은 담살이 출신이다.이 가운데 심남일의 '호남의소'의 경우, 1908년 3월부터 1909년 10월 9일 심남일이 체포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26회나 일본 헌병대나 수비대,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전투 순서를 보면, 강진-장흥-나주-화순-나주-보성-영암-장흥 유치 등 전남 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남도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안규홍·전해산·조경환 의병부대와도 수시로 연합작전을 전개했다.전남 서부지역에서 활동한 전해산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심남일·이대극·안규홍 의병 등 11개 의병부대 약 2천 명이 참여했다. 심남일 의병부대가 연합의진 형성에 가장 적극적이어서 호남동의단의 제1진이 됐다. '호남동의단'의 구성은 '기각지세'의 형성에서 의진 간의 연합전선으로 전환해 가는 모습을 보인다.쌍산의소 의병성과 막사터.화순군 제공후기 의병 때 호남 의병들은 연합작전을 수행해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다만 전기·중기 의병과 주도 세력에 차이가 나타난다. 우선 다양한 계층이 주도 인물로 등장하며 양반 유생들 가운데 명문가 후예들의 이탈이 두드러지고 있다. 기우만이 대표적인데 그는 1907년 무렵 '부터 의병 전쟁에는 비켜서 의병전기 편찬에 주력했다.이 시기에는 농촌 지식인들이 대거 의병장으로 등장하고 있다. 김용구·김태원·김율·이석용·문태서·전해산·심남일 등으로 서당 훈장 출신이 많다. 중인 신분(김동신·박도경), 담살이(안규홍), 행상(강무경) 등도 주도층으로 등장하고 있다. 황준성(유생)·정원집·추기엽(해산군인) 등 이 지역으로 유배를 왔다 탈출해 의병에 참여한 경우도 후기 의병의 특징이라 하겠다.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 · 백운산 호랑이의 기개, 대를 이어 전해지다
- · 총상에도 투지 꺾지 않은 부대 조직의 귀재
- · 대한제국 장교, 남도 누비는 의병장 되다
- · 호랑이 잡던 지주의 아들 어등산의 별이 되다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