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in] 가장 빛났던 날, '무등'을 만나 행운이었다

입력 2024.09.02. 17:21 이삼섭 기자
[무등in ⑦] 조선희 전 무등일보 1기 기자
입사시험 '무등을 논하라'에 신선한 충격
대동세상 떠올려…사회 모순 혁파하는 힘
무등 안에서 유등(有等)의 아픈 경험 겪어
타지서도 여전히 간직해야 할 나침반 역할
조선희 씨(전 무등일보 1기 기자)가 무등일보와 비대면 인터뷰 중 1988년 당시 기록했던 수습일지를 내보이고 있다.

'무등이 곧 광주이고, 광주가 곧 무등이다'는 말처럼 무등은 그 자체로도 광주의 브랜드입니다. 무등이란 이름으로 무등산의 아랫자락에서 시작된 이 도시에서 무등은 '상징' 그 이상의 무언가로 시민 일상과 삶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광주에서 무등을 상호명으로 쓰는 기관, 법인, 단체가 300여개에 이른다는 점이 이를 보여줍니다. 이들에게 무등일보가 묻습니다. 왜 무등인가요? 편집자주.

"저에게 있어 무등은 대체로 일상에서 망각하고 살아가는, 그러다가 문득문득 저 가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어떠한 것…. 무등은 저버릴 수 없는 초심이고 끝까지 간직해야 할 어떤 사유의 핵심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88년 무등일보 창간과 함께 1기 기자로 입사한 조선희 씨(62)는 젊은 날의 무등과의 만남을 잊지 못한다. 무등일보 창간호가 나오기도 전에 진행된 수습기자 채용 시험에서 나온 주제가 '무등을 논하라'였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들어왔던 무등을 논하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해졌죠. 그러면서도 이 문제는 얄팍하게 써서는 안 되겠다는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일종의 무등의 아우라라고 할까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실 그 순간 무등을 처음 만난 거였습니다. 그때까지 저한테 무등은 그냥 무등산이었고요. 어디에서나 눈을 돌리면 만날 수 있는, 등이 없이 완만한 산덩어리가 넓게 펼쳐진 그 무등산이 저한테는 무등이었던 거죠. 그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그 논제로 만난 무등, 그 엄정하고 긴장된 시험의 순간에 맞닥뜨린 무등은 정말 굉장히 깊고 넓었던 것 같아요. 처음으로 정말 그 무등에 관한 사고다운 사고를 했고 그거를 논리정연하게 써 내려갔던 그런 기억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 인생에 가장 빛났던 젊은 시절 그 한때 그 순간에 무등을 만난 것은 저는 행운이었다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1988년 7월 조선희 전 무등일보 기자(앞줄 왼쪽에서 7번째)가 수습 중 담양에서 열린 야유회에 참석한 모습. /조선희 씨 제공

시험에서 무등을 맞닥뜨리면서 그는 '대동 세상'을 떠올렸다고 했다. '경계마저 사라진 어떠한 상태'라는 무등의 뜻은 사람들이 한 데 어우러져서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면서 황석영 작 '장길산' 결말 부분을 인용했다.

"미륵 세상을 꿈꾸면서 하룻밤에 천불천탑을 세우는 민초들의 열망, 좌절됐음에도 그 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서 혁파하는 힘, 그리고 그것이 실현되도록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바로 그런 게 무등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등의 이름을 가지고, '무등 세상'을 말하는 기자조차도 가슴 아픈 '유등'(有等)의 경험 또한 겪을 수밖에 없었다. 무등일보에서 처음으로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기자인 조 씨가 출산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자 '취재 파트'가 아닌, '교열 파트'로 인사 발령이 난 것이다. 항의했지만 돌아온 건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었고, 출산한 여기자에 대한 차별로 다가왔다. 그가 무등을 떠나게 된 계기였다.

"추구하는 방향이 무등이라고 해서 거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나 수단이 무등일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신선한 출발이었고, 그 지향하는 바는 굉장히 새로운 도전과 모범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내재화되지 않아 조직의 시스템이나 제도, 또는 경영진의 사고방식까지를 변화시키기에는 너무나 일렀던 거죠. 여전히 야만의 어떤 기운이 남아 있는 그 시절이 아니었을까요.".

그럼에도 무등은 그에게 여전히 아직까지도 나침반으로 작동하고 있다. 무등에서의 첫 순간들의 기록들이 담긴 수습일지를 아직도 갖고 있을 정도다.

조선희 전 무등일보 기자(왼쪽에서 3번째)가 전남대학교 의대 소아과 손철 명예교수(맨 오른쪽)를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당시 조 씨는 손 교수와 함께 육아 주요 이슈를 정리한 '손철 박사의 육아상담' 코너를 진행했다. /조선희 씨 제공

늘 무등을 생각하고, 무등을 실천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향하게 하는 힘이다. 조 씨는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이 사회 또한 경계조차 사라진 평등한 세상으로 향하는 무등의 나침반이 작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조 씨는 광주사람들이 그토록 무등을 사랑하는 것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거역할 수 없는 동질감'으로 봤다. 무등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광주에서 어쩔 수 없이 타고날 수밖에 없는 타고난 기질과 성향, 무등산이라는 현현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어드는 정신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광주 사람들이 중요한 이름을 붙일 때 무등이라는 이름을 단박에 생각해 낸다. 그것에는 특별한 이유도, 장황한 설명조차도 필요 없다.

1999년 제주로 이주를 간 조 씨는 그곳에서 무등을 마주한다고 했다. 광주사람들에게 무등이 있듯, 제주사람들에게는 한라가 있어서다.

"광주에서 무등을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듯이 제가 살고 있는 제주에서는 늘 한라를 만납니다. 그러니까 제주도는 한라산이고 한라산은 제주도라는 말이 있거든요. 그런 것처럼 여기 제주분들도 가슴 속에 그렇게 똬리를 틀고 있는 정체성 또는 공동체 정신이랄까요? 그런 게 응축돼 나타나는 게 한라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물론 한라일보라는 신문 제호도 있고요. 제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한라, 마치 광주에 가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무등이 있는 것처럼 제주 사람들에게 한라와 광주 사람들에게 무등은 견줄 바 없이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주에서 사는 광주 사람이다 보니 여기에서 늘 만나는 그 한라 속에서 저는 역시 또 다른 광주를 늘 만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삼섭기자 seobi@mdilbo.com

덧붙이는 글: 기획 연재 '당신의 무등' 인터뷰는 오는 9월7일 개막하는 '제15회 광주비엔날레' 광주 파빌리온관에서 전시됩니다. 올해 처음 신설된 광주 파빌리온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무등: 고요한 긴장이란 주제로 시민들과 호흡합니다. 공동체, 연대, 포용, 인권 등의 단어로 대표되는 무등(無等) 개념을 다양한 방식과 협업으로 확장합니다. 5·18민주화운동 '비경험 세대' 가 주축이 된 여러 작가들이 광주정신의 예술적 계승 방식을 탐문합니다.

# 연관뉴스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2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0
0/300